창비주간논평
피의사실공표, 검찰과 언론의 기묘한 공생관계
최근 검찰발 ‘카더라’ 보도는 도를 넘어 도하(都下) 언론의 비루한 연명책이 되어버렸다. 부르는 대로 적고 원하는 대로 보도하는 언론은 검찰개혁이라는 정치의제를 어떻게든 타고 넘어야 하는 검찰의 권력의지와 더불어 그 길었던 공생관계를 새삼 다져나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 ‘피의사실공표’라는 법문제가 전사회적 의제로 자리한다.
피의사실공표, 막강한 검찰 권력의 배후
일각에서는 피의사실공표가 피의자의 인권을 침해하며, 공정한 수사권 행사를 기대하는 국민적 신뢰를 훼손하는 것이기에 금지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너무도 공허하다. 피의사실공표는 대부분 서민들의 문제가 아니다.(언감생심!) 그것은 권력이든 돈이든 사회적 명성이든 ‘가진 자’들의 문제이며 그래서 그들만의 리그에서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문제가 가진 자들을 전담하여 수사하는 검찰 특수부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현시대의 언론과 검찰은 피의사실공표를 통해 상호 간에 잉여적 권력을 주고받는 호혜적 관계를 구성한다. 검찰은 언론에 맞춤식 뉴스거리를 선물하고, 언론은 그것을 기사화하면서 검찰의 권력을 강화하는 선물을 나누어 가지는, 마치 포틀래치(potlach)와 같은 선물경쟁을 통해 이들은 더불어 다 함께 과잉의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우리 형사사법체계상에서 그동안 검찰은 법원 위에 군림해왔다. 한 사람을 단죄하고 처벌하는 권력은 주지하듯 사실상 검찰의 것이다.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에 서류 몇장만 담아 언론의 카메라를 가득 채워주는 압수수색 장면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법원의 유죄판결에 앞서 피의자를 구속하여 사실상의 형벌을 가하는 것 또한 검찰이다. 재벌이나 대기업총수들에게 적용되는 ‘3·5법칙’(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판결)의 특혜가 그러하듯, 검찰이 구속시키면 6개월이나 1년 정도가 지난 후 법원이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석방하는 것은 거의 관행이 되었다.
여기에 검찰 특수부가 주도하는 피의사실공표는 이런 권력의 배후를 구성한다. 피의자에 대한 사실상의 인민재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피의자는 수사에 관한 정보를 거의 얻지 못한다. 검찰이 이런저런 수사정보를 흘려도, 피의자는 그에 반박하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검찰이 각본과 감독을 맡고 언론이 주연인 B급 수사드라마 앞에서, 서민들은 검찰이 원하는 대로 울고 웃으며 그 피의자를 공개처형하게 된다.
법정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 우려
법정까지 영향을 미칠 위험도 있다.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편견과 예단에서 자유롭지 못한 장삼이사 중의 한 사람이다. 공소장에 공소사실 외에 법관이 예단해버릴 수 있는 기록이나 증거들을 첨부 못하게 하는 형소법상의 제도도 이런 위험을 고려한 것이다. 그럼에도 피의사실이 누설되고 언론이 대서특필하며 여론이 분분한 상태가 되면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은 물론 법관조차도 그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비록 법관이 확증편향 상태가 되어 “거봐, 내 말이 맞잖아”라는 검찰 측 주장만 추종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사전정보에 노출된 법관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피고인은 더 많은 주장과 증명을 해야 한다. 법정이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기에 공공정보의 공개를 당연시하며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미국에서조차 피의사실공표와 그 과도한 보도를 사법방해의 문제로 삼고 있다. 요컨대 검찰이 언론과 여론을 움직이면서 사법 과정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법원조차도 능가하는 권력을 과시하며 또 강화하는 것, 피의사실공표의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자리한다. 검찰이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법권력을 찬탈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인 셈이다.
‘알 권리’는 사라지고 ‘알릴 권리’만 남았다
언론의 조급성과 한탕주의는 이런 검찰 측 전략에 크게 기여한다. 피의사실공표가 금지되면 국민의 알 권리가 위축된다는 것이 일부 언론의 주장이다. 혹은 검찰을 언론이 감시해야 한다는 강변도 이어진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알 권리와 검찰 견제의 시점이다. 피의사실에 관한 한, 국민의 알 권리는 수사단계에서 보장될 일이 아니다. 그 단계에서는 검찰 측의 일방적인 주장만이 흘러나올 뿐 피의자 측의 반론이나 반대증거 혹은 주변적인 정보들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시민의 ‘알 권리’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검찰의 ‘알릴 권리’만이 보장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알 권리는 검찰 측과 피고인 측이 증거로 다투며 법리로 공방하는 재판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그리고 가장 잘 충족될 수 있다. 옳고 그름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에 의한 검찰 견제 또한 마찬가지다. 양측이 제시하는 주장과 증거를 바탕으로 기자가 자신의 판단으로 진실에 다가가며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그 사건을 평가할 수 있는 시공간이 바로 재판정이다. ‘카더라’식 보도 혹은 ‘복붙’식의 기사가 아니라, 현장에 기반한 보도와 논평을 통해 검찰의 수사권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에야 유무죄의 판단권과 실질적인 형벌권이 검찰에서 법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법치와 정의에 뿌리를 둔 형사사법체제가 제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검찰의 부실수사 혹은 그에 의한 불기소처분 등을 통제하려면 언론이 수사 과정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 검찰이 흘리는 피의사실은 오히려 역정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언론의 취재 의지와 능력이며 바로 거기에 저널리즘의 본체가 자리한다. 아울러 그런 직무유기성의 권한남용은 공수처 같은 별도의 제도적 장치로써 처리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피의사실공표라고 하는 검찰 주도의 정보 흘리기를 방치할 이유는 결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정 노력은 필수, 강력한 법규범도 뒤따라야
그렇다고 피의사실공표를 형법상의 범죄로 처리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1995년 이래 검사 한명을 기소유예한 것이 이 죄를 적용한 최대·유일의 조치였다는 보고도 있다. 피의사실공표죄의 주체는 대부분 검찰인 상황에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철칙에 충실한 우리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번 법무부의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과 경찰청의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 등의 규율을 통해 내부적 통제와 징계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다. 물론 이렇게 수사기관별로 나뉘어 있는 훈령들을 하나로 통일해 대통령령과 같은 보다 강력한 법규범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그에 부수된 조건이다.
아울러 오는 7월경 설치 예정인 공수처를 제대로 구성하여 수사단위에서 자의적으로 유포되는 피의사실을 제대로 수사하고 처벌하는 틀을 확보하는 것 또한 공수처법 통과에 수반된 중차대한 과제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론의 자정 노력이다. 검찰공화국이 정답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언론이 노력해야 할 것은 백브리핑, 티타임 등의 형식으로 흘러나오는 검찰의 막후공작을 차단하도록 하는 일이다. 언론이 검찰의 입을 중계방송할 것이 아니라 재판의 경과를 파고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점에서 검찰개혁의 최우선적 과제이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이 많지만, 현실에서는 언론이 바로 서야 검찰이 바로 선다.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0.1.8.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