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더 나은 미래를
불과 몇달 전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시절이다. 감염 현황만 놓고 봐도 며칠 새 분위기가 급변한 것이 벌써 여러차례다. 4월말부터는 해외유입 사례까지 줄면서 안정세로 접어드는가 했더니만, 지금은 초중고 등교개학을 앞두고 다시 확산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코로나19의 완전 종식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백신이 보급된다 해도 이제 우리의 일상은 방역을 염두에 두고 재편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 와중에 올봄 내내 예정된 행사며 공연들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제주4·3 추념식도, 세월호참사 추모행사도, 4·19혁명 60주년 기념식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 안타까운 상황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석달 남짓한 기간에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별문제 없이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은 참여를 통해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시민들의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감염 확산의 우려뿐 아니라, 거주국 사정으로 투표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재외국민들의 권리 문제도 제기되었고, 선거 직전 불거진 위헌적 ‘위성정당’ 때문에라도 선거를 그대로 진행하면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선거로 인한 감염은 없었고, 선거결과는 여당의 큰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여당의 승리가 방역 성공 덕이라는 견해도 많지만, 굳이 따지자면 코로나19 같은 위기상황을 두고도 무능과 무책임으로 일관한 미래통합당에 대한 염증이 그들의 몰락을 조금 더 부추겼을 수는 있겠으나, 이미 대세는 정해져 있었다고 보인다. 어쨌든 시민들은 촛불혁명 이후 개혁을 추진할 책무를 현 정부에 맡겼던 것이고, 이번 선거는 그 책임을 다할 기회와 권한을 주되 실현의 의무를 촉구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방역 성공조차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정비된 방역체계 덕분이니, 이를 반드시 현 정권의 공적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신뢰하기 어려웠던 지난 정권의 행태를 생각해보면, 위급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를 상당부분 제한하는 조치들에 대한 시민의 협조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현 정권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해도 무리가 없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유럽과 북미의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건대 한국의 방역이 모범적이었음을 굳이 부인할 이유는 없다. 국가의 역량과 시민들의 자발성이 결합하여 가능했던 이 결과를 두고 단순히 국가주의의 강화나 감시사회의 부활이라고 폄훼하는 것도 지나친 일이다. 다만 그럼에도 이번의 성과가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우려하게 되는 지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3주년 담화는 이제 실제로 개혁을 입법하고 실행할 능력을 갖추게 된 자신감과 코로나19 이후 사회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담고 있다. 우선 ‘ K-방역’이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는 자부심에 힘입어 바이오산업이나 의료, 교육, 유통을 포함한 비대면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전염병 시대에 대비해 디지털 인프라를 강화함으로써 한국을 ‘첨단산업의 세계 공장’으로 만들겠다는 대통령의 이 ‘한국판 뉴딜’에 대해 혁신성장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고, 결국 며칠 뒤 그린뉴딜이 포함된다는 추가발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야기하는 그린뉴딜은 생태적 전환에 대한 문제의식이 턱없이 모자랄 뿐 아니라 탄소배출 감축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조차 결여된 ‘녹색성장’ 담론의 연장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실제로 현재의 그린뉴딜 방안에는 애초에 코로나19 위기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생태문제와 기후위기에 대한 절박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방역 성공이 의료진과 국민 덕분이라고 공을 돌리면서도, 방역 과정에서 드러난 돌봄의 공백이나 필수노동에 대한 재평가 및 보장강화 문제는 담겨 있지 않다.
이번 사태로 한국인은 국난극복이 특기인 민족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일시적인 위기상황에서는 전력을 다해 대처할 수 있어도, 위기가 장기화·만성화된다면 의지나 임기응변만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한국형 방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간호 인력뿐 아니라 진단이나 역학조사 분야에서도 소위 선진국과 비교해 터무니없을 정도의 장시간 노동에 익숙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은 낮은 노동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대면접촉 없이 생활이 가능했던 것도 노동자의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고강도 저임금 노동으로 운영되는 배달 시스템이 발달되어 있었던 덕분이다. 온라인 생활을 지탱해주는 콜센터를 값싼 인력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한국의 특수성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성공은 높은 기술력과 시민의식뿐 아니라 인력을 ‘갈아 넣어’ 움직이는 데 익숙한 한국의 취약성 때문에 이루어진 면도 상당하다.
현재 위기 속에서 일구어낸 가장 큰 성과라면 이전에는 불가능해 보였을 대안을 공론의 장으로 끄집어냈다는 점에 있다. 전국민 고용보험의 기초를 놓고 국민취업지원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대통령이 발표한 고용대책이나, 긴급재난지원금이 도입되면서 주목받게 된 기본소득 방안에 대한 논의가 그 예다. 실제로 이는 이미 눈앞에 닥친 현실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난이 장기화된다면 이미 발표된 조치들만으로 충분할 것인가. 지금과 같은 일시적 긴급재난지원금만으로 시민들은 생활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인가. 대면수업이 불가능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무엇보다 일하는 부모들의 아이는 누가 돌볼 것인가. 장시간 노동과 성과주의의 압박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에서 환자가 대량으로 발생할 경우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볼 수 있는가. 질병관리본부는 아프면 쉬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코로나19에 대한 직접적인 공포가 사라지고 난 후는 말할 것도 없고, 공포를 견디는 지금도 노동과 휴식의 조율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요한 일들을 꼽다보면 디지털 기술은 전염병 사회에 대한 대처의 일부를 담당할 수는 있어도 문제해결의 핵심이 되기 어렵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이 위기를 넘겨도 또다른 전염병이 올 것이고, 지금 같은 삶의 방식을 지속한다면 결국 기후변화로 인한 더욱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할 것이다. 생존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 지금 요청되는 것은 살아가는 데 우선 필요한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고, 이윤추구보다는 돌봄을 위주로, 경제성장보다는 지속 가능성을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하는 일이다. 방역만 어떻게 잘하면 이제껏 누리던 편리함을 굳이 포기하지 않고도 지금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미래란 오지 않는다.
한국이 이룬 성과를 높이 평가해야 할 이유는 현재의 위기에 비교적 잘 대처함으로써 앞으로 이루어야 할 대전환의 계기와 논의의 장을 창출했다는 점에 있다. 위기에 완전히 함몰된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성찰과 실천적 토론이 가능한 공간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성과다. 하지만 거기에 도취된 나머지 이 위기를 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 열악한 시설이나 노동환경 속에서 감염되고 때론 혐오와 차별 그리고 인권침해 상황에 몰리기도 했던 시민들, 감염 우려로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던 희생자들을 잊는다면 아무리 대단한 방역성과라도 그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노동절을 앞두고 다시 반복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나 지금도 잇따르는 노동현장에서의 죽음을 기억한다면 마냥 자화자찬은 차마 못할 일이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에 대응하되 그에 머무르지 않고 근본적인 삶의 전환을 추구하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참다운 근대체제 변혁을 위해서는 근대에 대한 적응과 근대의 극복이라는 이중의 작업이 유기적으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본지의 주장이 기후위기를 가져온 근대적 삶을 극복할 대전환을 모색하는 시점에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백영경 /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2020.5.20.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