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인국공’ 사태와 우리 시대의 정의론
‘을들의 전쟁’
1931년 7월 2일, 조선일보는 만주 지역에서 토착 중국인과 조선 이주민이 충돌해 다수의 조선인이 사망했다는 내용의 속보를 긴급 타전했다. 이 소식은 한반도의 조선인들을 격분케 했고 성난 조선인들은 서울, 평양, 원산, 인천 등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인들을 습격해 130여명을 보복 살해했다. 당시 중국인과 조선인이 만주에서 잦은 충돌을 빚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조선일보의 저 특종은 명백한 ‘가짜 뉴스’였다. 조선일보가 급히 전한 그날의 충돌에서 실제로 사망한 조선인은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인국공 사태’(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에 ‘만보산 오보 사건’을 겹쳐 읽게 되는 것은 단지 이 사태가 언론의 자극적인 가짜 뉴스로 인해 야기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두 사건은 ‘을들의 전쟁’이라는 점에서도 묘하게 닮았다. 만보산 오보 사건이 조선과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뒤로 빠지고 양국의 피착취 민중들끼리 싸움을 벌인 불행한 역사였다면 인국공 사태는 경영합리화와 노동유연화를 부르짖던 세력들이 일순간 ‘공정의 화신’으로 둔갑해 을들의 싸움을 부추기는 오늘의 현실을 보여준다.
청년세대의 ‘독특한 도덕이론’
작금의 ‘(불)공정’ 논란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 단일팀 논란과 조국 전 법무부장관 자녀의 입시 문제에서도 ‘공정’은 뜨거운 화두였다. 시계를 더 뒤로 돌려보면 2000년대 초 시작된 KTX 승무원의 정규직화 투쟁을 둘러싸고도 비슷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렇듯 ‘공정’을 둘러싼 사회적 이슈는 거듭 반복되는데 왜 우리는 비슷한 사태가 터질 때마다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을까. 먼저 일련의 사태들이 정치적 대립으로 번지면서 공정과 정의에 대한 규범적인 틀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남북 단일팀 논란은 현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에 대한 찬반 여부로, 조국 자녀의 입시 논란은 검찰 개혁을 둘러싼 찬반 여부로 회수되면서 공정과 정의에 관한 규범적 토대를 설계하고 제시해야 할 지식인들조차 정치적 화력 제공을 위한 ‘불쏘시개’ 역할에 그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공정’과 ‘정의’를 규정하는 형식과 내용이 자신이 지지하는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건 지필시험과 같은 협소한 잣대를 ‘공정’을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물신화하는 태도 못지않게 불신과 냉소를 가져오기 쉽다. 당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 사회의 전체 구성원들이 느슨하게나마 공유할 수 있는 규범적인 정의관의 수립이 요청되는 이유다. 이에 관해 천관율 기자가 ‘20대 남자’ 현상을 분석하면서 내놓은 다음과 같은 주장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도덕 이론’이다. 지금 20대 남자들이 화가 나 있다면, 그들은 불리하다고 화를 내는 게 아니다. 불의하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현상을 다루기 어렵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의 뿌리에는 아주 독특한 ‘도덕 이론’이 있다.”(『20대 남자』, 시사인북스 2019, 8면)
인국공 사태에 국한한다면 이 독특한 ‘도덕 이론’은 비단 20대 남자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같은 책의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 성별과 무관하게 오늘날 20대들은 경쟁과 객관식 시험에 따른 차등적 보상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6월 29일 YTN 의뢰로 진행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와도 합치한다. ‘역차별 우려 등 부작용을 고려해 정규직 전환을 보류해야 한다’에 공감한다는 전체 응답 비율은 45.0%였지만 20대의 응답 비율은 55.9%로 평균을 훌쩍 상회해 전연령 중 최고 수준을 보였다.
‘공정’과 ‘정의’에 관한 규범적 논의가 필요하다
청년들의 불만과 박탈감이 일종의 체계화된 ‘도덕 이론’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면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 역시 ‘도덕 이론’에 걸맞은 규범적 차원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 시대의 정의론’을 새롭게 작성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같은 물음과 마찬가지로 애써 하나의 완료된 답변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즉각 그 답변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낯설고 미끌거리는 무언가를 감촉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작업을 더는 미뤄둘 수 없는 건, 지금처럼 규범적 논의의 토대가 취약한 상태에서는 사회적 구성원들이 수긍할 수 있는 적절한 합의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증폭된 갈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희석되거나 어설프게 봉합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논란과 몸살의 악순환을 피하기 어렵거니와 갈수록 그 갈등의 정도 역시 강해질 수밖에 없다.
공정과 정의에 관한 새로운 규범적 토대를 만들어가는 것은 각 방면의 전문가 및 지식인이 앞장서야 할 일이지만 한명의 시민으로서 그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밝히는 것도 논의의 진전에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인국공 사태를 비롯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과정에서 논의의 규범적 토대로 삼을 만한 한가지 논점을 제안하고 싶다. 다름 아닌 ‘비례의 원칙’이다.
‘비례의 원칙’은 현행 법률에서 세가지 하위 원칙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국가기관이나 행정청이 사용하는 수단은 그 목적에 맞는 수단을 사용해야 된다는 ‘적합성의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적합수단을 쓸 때도 당사자의 권리나 자유에 대한 침해가 가장 적은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는 ‘필요성의 원칙’이며, 마지막으로 적합하고 침해가 가장 적은 수단을 쓸 때도 그 수단이 가져오는 공익과 침해하는 사익을 비교해서, 공익이 클 때만 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상당성의 원칙’이다. 물론 ‘비례의 원칙’은 국가가 보호하려는 공익과 그로 인해 침해받는 사익 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익과 사익의 대립으로 나타난 인국공 사태에 딱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합성, 필요성, 상당성의 원칙들을 유연하게 확장해 이번 인국공 비정규직의 직접고용과 관련된 사태에 적용해본다면 다양한 논점들에 대해 더 깊은 토론과 논쟁의 계기를 마련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번 인천공항 보안요원 정규직화의 목적은 당연하게도 인건비 절감과 노무관리의 수월성을 내세워 필수 인력을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관행을 공공기관부터 고쳐나가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수단은 세가지 정도다. 첫째, 기존 인력을 해고하고 공채시험으로 정규직을 뽑는 것. 둘째, 기존 인력을 공항공사 내 자회사로 편입하는 것. 셋째, 기존 인력을 공항공사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 이때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권리나 자유에 대한 침해가 가장 적은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의 원칙’과 상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당사자는 인천공항과 기존 비정규직 인력이다. 취업준비생들은 자신들도 당사자라고 주장하고 싶을지 모르나 권리와 자유의 측면에서 그들이 인천공항공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일각의 주장처럼 기존 인력을 해고하고 새로 정규직 직원을 채용하는 것은 기존 노동자들의 권리를 심대하게 침해하는바 ‘필요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자회사 편입 역시 이번 조치의 목적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임을 염두에 둔다면 불완전한 정규직화에 불과하기 때문에 역시 ‘적합성의 원칙’에 정확하게 부합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적합성의 원칙’과 ‘필요성의 원칙’에 비추어 봤을 때 가장 합당한 것은 기존 인력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남은 것은 ‘상당성의 원칙’인데 사안 간의 이해대립에서 이 문제는 보호받는 권익과 침해받는 권익을 비교함으로써 살펴볼 수 있다. 이때 보호받는 권익은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것으로 이것은 누구나 뚜렷하게 인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에 비해 취업준비생들이 침해받았다고 하는 자신들의 권리는 뚜렷하지 않거나 인천공항 비정규직이 정규직화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라고 특정하기는 어렵다.
‘공정’을 넘어 ‘평등’으로
한편 이러한 규범적 논의는 연역적 과정이 아닌 현실의 다양한 갈등 사례로부터 소급해가는 귀납적 과정을 통해 펼쳐져야 하며 불평등한 오늘날의 구조적 현실에도 민감해야 한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강제하는 사회적 불평등과 그 계층 분할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시험 이데올로기’는 그런 점에서 새로운 정의론을 작성할 때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의 핵심이기도 하다. 대기업/공공부문과 민간 중소기업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그대로 둔 채 대기업/공공부문에 진입하는 과정에서의 ‘공정’의 절차만 따지는 것은 ‘을들의 전쟁’을 더욱 첨예화하는 효과를 낳기 십상이며, 한번의 ‘시험’이 생애주기 전반에 나타나는 격차와 불평등을 정당화한다는 주장에 내재한 이론적 토대의 부실함과 기이한 사도마조히즘적 경향 역시 규범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단지 자신의 이해만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해를 옳고 정의로운 관념에 합치시키려는 부단한 작업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하지만 압축적인 근대화 과정 속에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온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공정과 정의의 개념을 규범적으로 제시하려는 노력을 현실을 모르는 ‘샌님’의 관념적인 소리로 치부해왔다. 현재 청년세대들이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협소한 능력주의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난할 수는 있지만 그럴 때조차도 기성세대가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들은 공정과 정의에 관한 한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아노미 상태’로 방치해온 것이고 청년들은 지금에서야 그 공백을 나름대로 메꾸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청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험’과 ‘공정’의 프레임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엄연한 불평등의 문제를 다루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인국공 사태’는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단지 과정에서의 ‘시험’ 하나만으로 결과의 ‘공정’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현존하는 불평등의 구조로 보아 ‘환상’에 가깝다. 거듭 그 불평등의 현실을 내재적인 구조로 파악하는 새로운 정의론의 구상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20.7.8.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