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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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문재인, 그리고 트럼프

서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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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유엔이 채택한 ‘올림픽 휴전 결의’는 한국에게 또 한번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결의에 따라, 2018년 봄에 예정되어 있었던 한미연합훈련이 유예되고, 북한 선수단이 평창에 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습니다. 안전을 우려했던 평창 동계올림픽은 평화 올림픽으로 전환되었고, 남·북한 사이에 대화가 재개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북 간의 대화는 미국과 북한 간의 대화로 이어졌습니다.”

 

2019년 9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말했다.

 

이번에는 뜻밖에도 일본이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토오꾜오 올림픽이 내년 여름으로 연기된 것에 맞춰 일본이 ‘올림픽 휴전 결의안’을 제출했고, 유엔 총회 결의안 74/560이 지난 7월 6일 반대 없이 통과됐다. 내년 여름까지 모든 유엔 회원국이 휴전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스포츠와 올림픽 이상을 통해 평화롭고 더 좋은 세상을 건설하며’라는 이름의 이 유엔 총회 결의문은 그 며칠 전인 7월 1일 유엔 안보리가 채택한 ‘코로나19 세계적 유행병에 따른 인도주의 휴전’ 결의문에 뒤이은 것이었다. 이 결의문들이 한반도에 또 한번의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인가?

 

답을 찾기 위해 잠시 1919년 영국 식민지였던 인디아로 돌아가보자.

 

간디의 전략적 공감

 

1919년 4월 13일 인디아 북부 펀자브 지방의 어무리처에서 민간인 대학살이 벌어졌다.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인디아인들의 요구가 치솟던 중 종교축제로 모인 군중을 향해 영국군대가 발포했다. 공식집계로는 사망자 379명, 하지만 최대 1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비극적인 학살을 접한 마하트마 간디는 중요한 결정을 했다. 본격적 비폭력투쟁의 시작이었다. 무장한 군인이 비무장 민간인에게 발포하여 학살을 자행했는데 비폭력투쟁이라니, 도대체 간디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어무리처 학살에 대해 영국의 자유당과 노동당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폭력 사용에 주저하지 않던 보수당과는 달랐다. 정부와 보수당은 식민지 민중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다수의 식민지 인명을 살상하더라도 대영제국을 보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유당과 노동당은 달랐다. 인명 살상에 깊은 우려를 보였다. 제국을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근원적인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식민지 민중도 영국인과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기류가 확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간디는 어무리처 학살을 대하는 자유당과 노동당의 태도에서 영국의 근본적 변화를 읽었다. 학살이라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과거의 행동양식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데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미세하지만 지각을 변동시킬 만한 변화를 감지했다. ‘영국인들은 인도인의 생명을 파리 목숨같이 여기지 않기 시작했다, 인디아 민중이 비폭력적 방법으로 독립을 요구해도 군사력으로 강제진압은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930년 소금행진으로 이어졌고 결국 인디아는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재커리 쇼어(Zachary Shore)는 간디와 같이 상대방의 근원적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을 ‘전략적 공감’이라고 부른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생각해보는 능력이다. 물론 한자 문화권에서는 오래 전부터 ‘역지사지’라는 좋은 말을 쓰고 있다. 같은 말이지만 쇼어의 연구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행동유형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상황 변화가 있을 때 상대방이 오히려 과거의 행동 유형에서 벗어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간디가 어무리처 학살 사건 이후 영국의 행동에서 과거 유형 탈피를 포착했던 것과 같이.

 

과거의 유형에서 벗어난 북의 행동

 

핵무기 완성을 선언한 2017년 이후 북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과거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호전적 북한’의 행동양식에 맞게 움직이고 있는가? 만약 북한이 과거의 행동양식을 되풀이하고 있다면 지금은 과거보다 더 도발적어야 할 것이다. 로동신문이 주장한대로 “불구대천의 핵 악마를 행성에서 영영 쓸어버리기 위한 정의의 보검”을 쥐었다면 과거보다 더 호전적으로 날뛰고 있을 것이다. 한국을 상대로 대대적 전쟁준비를 하거나 사방에서 도발을 벌이며 정세를 불안하게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다. 마치 핵무기를 손에 쥐자마자 양순해진 것과 같이. 2018년 초부터 유화적 모습을 보이더니 일련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에 나왔다. 이 회담에서도 ‘핵 강국’으로서 무리한 요구를 강요했다기보다는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아예 말도 꺼내지 않고 있다. 북이 일관되게 요구한 핵심은 적대관계 해소, 전쟁 종식과 평화체제 구축 아닌가.

 

과거에도 ‘위장 평화공세’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에 하지 않았던, 깜짝 놀랄만한 행동을 취하고 있다. 손해를 보면서도 일방적 양보를 하고 있다. 북과 협상을 해본 사람은 안다. 6자회담 과정을 아는 사람은 안다. 북은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나라다. 자그마한 양보라도 얻어내려면 반드시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주어야 하고, 그 반대급부는 북이 생각하는 값에 맞아야 한다. 반대급부가 없거나 값이 맞지 않으면 협상은 깨진다.

 

하지만 지금 북은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다. 핵무기 시험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지 않은 지 1년 반이 넘었다. 2019년 연말까지 유예기간을 주고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공언하면서도 또 6개월을 아무 일 없이 보냈다.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것은 충격적이지만 한국에 불만을 표시하는 행동도 철저히 북한 내부의 시설에 국한되었다. 휴전선 일대에서의 군사행동은 자제하고 있다. 과거의 행동유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례없는 행동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필요한 전략적 공감

 

문재인 대통령은 간디가 되어볼 필요가 있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니 ‘전략적 공감’도 잘할 것이다. 북의 이러한 놀라운 변신은 무엇인가. 이 놀라운 변화에 놀랍다는 공감을 할 수 있다면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향한 새로운 흐름을 만들 수 있다.

 

북의 변화가 지향하는 전략적 의미를 포착한다면 지금 시급한 것은 북미정상회담보다는 한미정상회담이다. 한국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미 남북과 북미 정상이 평화체제를 구축하기로 합의했으니 당연하면서도 필연적 수순이다. 아직까지 한미 정상이 이런 선언을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평화체제의 구축에 맞추어 한미연합사의 대비태세를 전환하라는 전략명령을 하달하는 것이 다음 수순이다. 북과의 전쟁상태를 전제로 하는 ‘조건에 기반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도 당연히 수정되어야 한다. 전제가 달라진다면 전작권 전환은 오히려 앞당겨질 수도 있다. 한미연합 군사훈련 문제는 이러한 근본적 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새로 출범하는 외교·안보팀이 이러한 흐름을 만든다면 북을 다시 남북 대화와 협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은 당연히 성사될 것이다. 물론 더 중요한, 한반도 평화와 번영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유엔 안보리와 총회도 자리를 깔아주었다.

 

서재정 /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2020.7.15.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