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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민주화

강경석

강경석

요새는 ‘한국어문학과’ 또는 ‘한국어문학 전공’이라는 식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명색 국어국문학과 출신의 문학평론가로 십수년을 자처하면서도 정작 우리말과 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낡은 비유지만 그저 물과 공기처럼 그것을 사용했을 뿐 그 역사라든가 원리, 언어생활의 개선 문제 등은 교육당국자 아니면 국어학자들의 소관이라고 막연히 미뤄온 셈이다. 학교 다닐 적에도 음운론이니 형태론이니 하는 국어학 개념들은 어찌 지루하고 답답하던지 수업시간을 피해 막걸리나 마시러 다닌 기억이 더 또렷하다. 다만 옛 문헌을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의욕은 조금 있어서 임진란 이후의 한글문헌을 다루는 중·근세어 강독 수업에 열심히 참여한 것을 스스로 기특하게 여기는 정도였다.

 

우리 말과 글에 대해 새삼 환기하게 된 최근의 계기가 있다면 BTS의 노래가 세계적 선풍을 일으키며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들을 접하게 되면서다. 꼭 바깥에서 각광을 받고 와야 자신의 것을 돌아보기 시작하는 패턴이 식민지 근성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매사를 후진국 현상으로 냉소하는 태도 또한 별로 건강한 것은 아니며 지금쯤은 사실에도 맞지 않는 면이 있다. 하다못해 국내외에서 늘어나는 외국인 한국어 학습자들에게 더 나은 커리큘럼을 제공하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위해서라도 생활 속의 우리말과 글을 새롭게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의 중요성이 때를 가리는 것은 아니지만 촛불혁명으로 대변되는 민주화의 획기적 진전 가운데 중앙집권적인 규범언어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말과 글의 민주화로 생각을 확장할 수 있다면 해당 과업을 교육당국자나 국어학자들에게 ‘턴키’로 ‘아웃소싱’할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발견이지만 언어는 누구나가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는 모두의 공동영역(commons)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한글날 즈음하여 때마침 나온 두권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영문학자 백낙청, 한문학자 임형택, 국어학자 정승철 최경봉이 참여한 한국어 관련 좌담을 단행본으로 확장한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창비 2020)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작가 조 메노스키(Joe Menosky)가 쓴 역사판타지소설 『킹 세종 더 그레이트』(핏북 2020)이다. 특히 후자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텔레비전 SF 프랜차이즈 『스타트렉』의 공동작가 중 한 사람이 썼으며 영문판과 우리말 번역본이 올 한글날을 기해 동시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고 곧장 우리 독자들 사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작가 본인도 밝혔듯이 이 소설은 정사(正史)에서 자유로운 판타지다. 이른바 팩션(faction) 열풍이 대중문화를 휩쓴 지 오래인 마당에 유교문화에 둔감한 설정이나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와 세종대왕 사이의 우정과 갈등쯤을 극화했다고 해서 공연히 실눈을 뜰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작가의 세종 숭배는 오해 속에 칭송받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불행이라던 장 꼭또(Jean Cocteau)의 발언을 연상시킬 정도이지만 낯 뜨거운 오리엔탈리즘 가운데서도 때로 진실의 옷자락을 붙든다. “진정한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모든 과정을 혁명이라고 칭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심지어 왕정에서 가장 급진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는 반정(反正)도 그러했다. 왕권은 절대적이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절대성이 전복 가능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반정 또한 변화의 한 갈래일 뿐, 혁명이라고 칭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세종이 한 이번 일은 어떠한가?//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201면)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鄭麟趾)의 내적 각성을 빌린 이 대목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한 핵심이거니와 다인종 사회인 미국의 전형적 제국서사로서 행성연합의 우주 개척을 다룬 『스타트렉』의 작가가 세종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한글창제 영웅신화의 선전자로 나선 일은 여러 모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BTS 뮤직비디오가 유튜브를 통해 세계로 전파되고 이미 “글로벌 영상화”가 예약되었다는 『킹 세종』의 광고문구가 보여주듯 예의 세계 변화의 중심동력 중 하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매체변화이다. 저물 줄 모르는 영어의 위세 또한 그에 힘입은 바 클 것인데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에서 다음 대목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국제공용어로서 사용범위가 넓어질수록 언중들이 그 언어로 자신의 가장 절실한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적 가치는 줄어들게 되어 있어요. 링구아프랑카(lingua franca)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 지역적으로 한정된 독자성을 유지 못하면 언어의 창조력도 쇠퇴한다고 봐요. 영어의 위세에는 그런 양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백낙청, 159면) 글로벌화된 영상언어 또는 국제공용어로 번역이 용이하려면 『킹 세종』이 그렇듯 해당지역의 구체적 현실과 역사, 그 고유한 담지체로서 언어가 지닌 맥락에서 이탈 압력이 커지게 마련이지만 실은 그 때문에 해당지역 언어의 창조력 또한 제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역의 언어와 역사와 현실을 세계화의 제약조건처럼 받아들이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 그 제약으로부터의 탈피는 실상 자본주의세계체제를 이끄는 특정지역 언어의 지배질서를 승인하고 재생산하는 투항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의 참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어의 소멸 가능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예의 지역적 독자성의 존속에 대한 낙관에 있을 것이다. 세계체제 내에서 한국 또는 한국문화의 지위가 앞으로도 더욱 향상되리라는 전망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거니와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하고 나름대로 키워나갈 일이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언어규범의 성채를 빈틈없이 다져서 그밖의 것들을 제거해나가는 위로부터의 표준어중심주의로 돌아가는 길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팬데믹 시대의 소위 ‘K방역’이 이루어낸 성과는 방역정책과 당국의 준칙 때문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듯 시민들 각자의 마음속에 밝혀진 촛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하고 표현하는 우리의 말과 글이 바로 그 촛불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20.10.1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