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
판·검사를 알아주는 기풍이 오래였다고 해도 요즘처럼 법률가 집단이 사회 전면에 얼굴을 드러낸 시절은 또 없었다. ‘법조국회’라는 말이 나돈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21대 국회도 의석의 15%가량인 46석이 법조 출신들에게 돌아갔다. 공중파와 인터넷 방송을 막론하고 시사프로그램마다 변호사들이 주요 스피커로 등장한다. 일반국민들 누구나가 현직 검찰총장의 이름과 주요 동정뿐 아니라 그의 심복 검사 리스트까지 욀 정도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판결이 있을 때마다 담당판사의 이력과 그의 정치성향이 언론에 도배되고 심지어 그 근처를 드나드는 언론사 법조팀 기자들까지 덩달아 이목을 끈다. 법치국가로 발전해나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까.
정치의 역할이 사회적 이해와 갈등을 조정하는 데 있다는 상식은 어쩌면 옛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목격하듯이 주요의제의 상당수는 국회나 국민여론이 아닌 사법판단에 의해 결론이 내려지곤 한다. 여야정쟁은 걸핏하면 고소·고발로 끝을 맺고 검찰총장 징계 같은 대통령의 인사행위나 코로나 방역조치에 대한 특정 종교단체들의 조직적 훼방에 대한 처분도 결국 사법부가 그 옳고 그름을 가린다. ‘법’이 최종심급이 되는 한 그것은 갈등을 조정하거나 해소하기보다 대개 어느 한쪽의 침묵을 강제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남는 문제는 늘 그 판결 자체에 대한 시비로 수렴되고 정해진 수순처럼 논란이 비등하면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지 말라는 판에 박힌 대응 레퍼토리가 따라 나온다. 사법부의 독립을 부정하고서야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으니 적어도 사회제도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일종의 외통수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사법부의 독립 여부가 아니다. 때로는 거의 자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사법부에 대한 예속, 그러니까 오히려 행정부와 입법부의 독립성 위기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행정부의 사법 종속을 내부에서 가속화하는 것은 역시 법리의 전장이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인 검찰이지만 입법부의 사법 종속을 야기하는 내인은 단순히 법조 출신 국회의원들의 의석수라기보다 그것을 포함한 국회 일반의 정치적 무능에 있을 것이다. 촛불 이후 적폐청산이나 검찰개혁과 같은 의제들이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특수 조건을 고려하면 삼권분립 체제 내부에서 일어난 사법부 쏠림현상은 입법부의 정치적 무능과 행정부 소속 검찰의 유별난 조직이기주의가 마주쳐 일어난 한시적 부작용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문제가 거기서 그치는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사법’은 입법, 행정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법지식이라면 접근성이 좋다고까진 할 수 없어도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습득 가능한 공유재일 테지만 그 해석과 적용, 판단은 법률가 집단이 실질적으로 독점한다. 가령 의료적 판단을 독점하는 의사만 하더라도 환자의 예후를 통해 그 판단의 옳고 그름이 입증될 수 있지만 사법판단의 경우는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들의 최종 판단은 대개 견제되지도 검증되지도 않는다. 아니, 그들의 판단을 견제하고 검증하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뿐이다. 이른바 사법농단의 심판은 어느 손에 결론 내려질 것인가. 그런 가운데 가습기살균제 1심 재판은 관련 기업들에 대한 무죄 선고로 마무리되었다. 비상한 코로나 위기상황 속에서 정부 방역 시스템을 교란하는 데 앞장섰던 소위 종교지도자들도 연이어 석방되었다. 풀려난 피고인들과 이해관계자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이런 판결들은 어떤 경로로 만들어지는 걸까.
법 해석과 적용을 법률가 집단이 독점한다고 했거니와 그에 따르는 특권의식이 국민적 상식에 반하는 판결들의 발생 요인일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그들이 과거의 특권 엘리트들과 달리 단순 ‘법 기술자’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비판도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차라리 A.I.에 재판을 맡기자는 냉소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법률가들로서는 일반 국민들이 법리를 잘 몰라서 사법적 권위를 쉽사리 훼손하려 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라는 생각이 찾아드는 순간 국민으로부터 ‘독립’한 검찰·사법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정치권력의 손발 노릇을 겨우 벗어나나 싶으면 아예 문민통제의 틀 밖을 바라보곤 하는 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그런 ‘독립’이 주어져선 곤란하지 않을까.
백보 양보해서 ‘살아 있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국민적 상식, 법감정에조차 구애받지 않는 초월적 독립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거기에도 나름대로 바람직한 일면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이 과연 그런지는 다른 문제다. 최근의 가습기살균제 관련 1심 재판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국정농단 연루 재판 과정만 보더라도 금권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할 만했다. 결과적으로 실형이 언도되지 않았느냐고 반론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법의 준엄한 심판이 작동했다기보다 피고를 배려하기 위한 갖은 노력―가령 준법감시제도의 설치 제안과 같은―이 실패한 결과에 가깝지 않을까. 어차피 무죄 판단은 불가능한 셈이었으니 집행유예를 선고해 역풍에 시달리느니보다 최소한의 실형을 선고하는 편이 어쩌면 후일을 도모하기에도 나은 면이 있었을지 모른다. 촛불에 힘입어 정치권력에서 놓여나기 시작한 사법이 독립성의 회복이라는 미명 뒤에 숨어 금권을 귀의처로 선택했다면 예의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라는 식의 태도가 아예 ‘너희들은 몰라도 돼’라는 파렴치로 전락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일각에서 제기된 국민배심원제의 전면 도입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어떤 이들이 어떤 목적으로 어떤 절차를 거쳐 법률가로 배출되는지를 소상히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사법개혁의 종지는 아마 거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21.1.20.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