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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함께 이 비를 맞자: 3‧8 여성의 날을 보내며

이진희

이진희

정체성은 계속 변화한다. (…) 우리는 페미니스트이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누구와 싸우고 연대하는가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한다. —장애여성공감 20주년 선언문 중

 

휠체어를 타고, 비틀거리며 걸으며, 경직된 입술로 알아듣기 힘든 말을 내뱉고, 수어로 말하는, 어딜 가나 문제있는 사람으로 눈에 잘 띄는 몸…… 장애여성운동은 장애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승인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명해야 할 정치라고 말한다. 장애인복지법이 승인하여 복지카드를 발급받고 〇〇장애 〇급이란 신분증을 쥐었을지라도 제도에 삶을 위탁하지 않으려면 장애란 무엇이고, 여성이란 누구인지 계속 질문해야 했다. 장애여성이란 개념은 정체성에 따른 차별과 운동의 독자성을 드러내는 지향이지만, 여성과 장애의 범주를 의심하고 연대하는 실천 속에서 갱신된다는 것을 페미니스트 동료들에게 배웠다. 고 변희수 하사의 죽음으로 트랜스젠더 여성이 살아내야 할 현실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는 지금 나는 그녀가 남긴 “힘을 보태어, 이 변화에”라는 말에 기대어 장애여성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페미니즘이 더 열심히 비를 맞고 싸우자는 이 글을 쓴다. (고 변희수 하사는 육군이 강제전역 처분을 내린 2020년 1월 22일 기자회견에서 “저는 미약한 한 개인이겠으나 힘을 보태어 이 변화에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의 복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3월 6일 ‘#힘을_보태어_이_변화에’ ‘#변희수_하사를_기억합니다’라는 해시태그로 추모행사를 열었다.)

 

여성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여성피해자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제도는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해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대안을 만들지 못해왔다.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정부는 ‘여성피해자’와 ‘정신질환 남성가해자’라는 프레임으로, 즉 젠더는 피해, 장애는 가해로 등치시켰다. 이는 장애(여성)를 피해자로만 호명하거나, 최근 (트랜스)젠더를 침입자로 낙인찍는 현상과 대비된다. 그런데 이 구도에서 ‘여성피해자’ 안에 이주여성, 장애여성, 빈곤한 여성, 노인여성, 성소수자, 아동청소년이라는 교차적이고 중층적인 정체성이 얽힐 수 있는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를 구성하는 조건으로 ‘장애’만을 설정하는 것은 장애에 대한 낙인과 차별로 이어질뿐더러 ‘가해하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비판해왔지만, 제도는 이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피해의 개념과 범주를 확장시킴으로써 젠더 폭력의 구조를 설명하고 싸워왔다. 이러한 역사를 퇴행시키는 성별이분법에 기반한 여성/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정책은 많은 여성의 피해와 인권을 설명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특정한 여성의 피해 경험만을 특권화함으로써 다양한 차이를 가진 여성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폭력, 그리고 그 발생 구조를 감췄다. 특히 생물학적 특징으로 여성을 동일하게 정의하려는 시도가 여성을 피해자로 한정하고 트랜스젠더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구별하기 위해서 진행될 때는 자의적인 기준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에 비추어 남성이 정의될 때에도 성별이분법이 더욱 강해지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해답은 가려질 수밖에 없다.

 

여성폭력에 맞서는 정책이라면 차별을 발생시키는 구조에 기대어 여성을 피해자로 고정할 것이 아니라, 권리의 위계가 만들어내는 차별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사회는 여성의 개념을 한정하고, 차별의 구조를 끊임없이 비가시화하며 혐오와 불평등을 심화해왔다. 장애여성에 대한 ‘보호주의’도 마찬가지다. 장애여성의 취약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가해자를 엄벌하는 척하면서 폭력이 발생하는 진짜 구조는 그대로 유지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에게 성적 권리가 있다는 것, 어떤 장애인도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으로 인해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싸움은 멀게만 느껴진다. 피해를 강조하며 장애여성에게 두려움을 부추기면서 장애여성이 살아갈 세계는 협소해졌다. 안전을 위해 선택지는 늘 최소화되었다. 자기결정능력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만이 남았다. 어둠 속을 더듬어 가기 위해 동료가 필요했다. 집에는 더이상 머물 수 없었고 집 밖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우리에겐 보호주의라는 우산 하나만 들려져 있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있기에 장애여성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집을 떠나 단 하나의 선택지였던 보호주의를 던져버릴 수 있었다. 비를 맞고 비틀거리며 자유를 느끼며 걷고 또 걸었다. 동료들과 걸어가며 피해자로서 말하고 피해자가 얼마나 중첩된 위치에 서 있는지 발견하고 싸우게 되었다.

 

장애여성운동은 여전히 국가적 ‘보호주의’와 싸우고 있다. 왜 장애인 거주시설의 인권침해와 차별의 문제는 잘 드러나지 않는가. 학대 프레임은 ‘보호’해야 할 장애인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관리자’를 문책하는 수준에 머무른다. 장애인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시설이라고 보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가 배제되고 공적 공간에 참여하지 못하게 차별받는다. 장애여성운동은 장애여성으로서 당연하게 할당된 장애와 여성이라는 그 자리를 거부하며 싸운다. 이 차별을 공고히 하는 가족제도, 빈곤한 사람이 배제된 주거권, 성적 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억압하는 성규범, 보호소와 요양병원에 갇힌 몸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간파한다. 일라이 클레어(Eli Clare)가 『망명과 자긍심』(전혜은‧제이 옮김, 현실문화 2020)에서 강조한 ‘다중 쟁점 정치’가 우리에게 영감과 힘을 준다. 마치 환경운동가와 벌목노동자, 여성과 트랜스젠더가 대립되어 보이지만 다중 쟁점 정치는 그들이 처한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고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쟁점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페미니즘이 변화를 잃지 않는 운동일 수 있게 한다. 또한 그는 ‘우리 각자의 우리의 퀴어다움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길 원한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도망쳐온 과거의 집을 기억하면서도 더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로 살기 위해선 끊임없이 도전과 변화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보호가 아니라 권리와 자유를 향한 이 싸움엔 늘 페미니스트들이 함께했다. 동료가 된 페미니스트들은 장애여성에게 진짜 여성이냐고 묻지 않았다.

 

2020년 1월 22일 육군은 고 변하사에게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리고 강제전역 조치한다. 장애를 이유로 변하사는 군에서 퇴출당한다. 작가 김비는 그의 책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삼인 2011)에서 자신이 “남자답지 못한” “모자란 아이”로 규정당해왔다고 썼다. 1973년까지 동성애는 정신의학적 장애로 분류되었고 성별위화감, 성별정체성 장애는 여전히 정신의학적 질환으로 분류된다. ‘모자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장애화된 트랜스젠더의 몸은 그가 살고 싶은 성별정체성이 아닌 ‘장애’라는 또다른 차별에 갇혀버린다. 이때의 장애는 장애인으로 그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나. 장애 3급인 변하사가 받을 수 있는 국가의 지원은 없었다. 낙인찍고 배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장애를 이용한 인구통치는 이런 식이다. 복지예산 문제로 장애인구가 늘어나지 않게 관리하려 하지만, 변하사를 강제전역시킬 목적인 장애 판정은 신속했다. 우리는 불구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국가가 통치를 이유로 내리는 행정적인 장애라는 딱지에 위화감을 느낀다. 또한 그러한 딱지를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트랜스젠더에게 붙이는 국가에 분노한다.

 

김비 작가는 「내 글의 목숨」(『자음과모음』 2020년 여름호)에서 “‘가짜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살면서” 오히려 ‘가짜’의 근원을 궁금해했고 “자연스레 ‘가짜’라는 말에 더 강하게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라고 썼다. 진짜 여성, 진짜 장애인, 진짜 빈민, 진짜 난민을 구분하기 위해 ‘진짜 자격’을 묻는 국가의 제도적 위계와 판정의 권력 앞에 사회적 소수자들의 진짜 삶은 드러나지 않는다. 세금도둑이거나 여성의 자리, 남의 나라에 들이닥친 침입자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어쩌면 ‘정상’과 ‘진짜’에서 멀찍이 멀어진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짜 존엄하고 인간다운 삶일지 모른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마련한 추모행사 ‘기억하기, 그리고 곁을 살피기’에서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은 ‘나’ 자신과 살아가면서 전략적으로 지혜롭게 싸우고, 나들끼리의 연대, 존재를 확장시키는 연대를 해가자고 했다. 함께, 연대하면 차별과 두려움의 실체가 더 잘 보인다. 내가 비 맞는 이 길이 어디쯤인지 보이게 된다. 혼자서는 알기 어렵다. 장애여성 운동은 불구의 몸들 곁에서,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며 싸우겠다. 그러니까 페미니즘, 더 힘을 내어 함께 이 비를 계속 맞자. 빗속에서도 늘 무지개는 뜬다.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2021.3.1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