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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거울: 애틀랜타 총기 사건과 우리가 불러야 할 이름들

정가영

정가영

지난 화요일 미국 애틀랜타에서 총기 사건이 발생했다. 21세 백인 남성인 로버트 에런 롱(Robert Aaron Long)은 세곳의 마사지숍을 차례로 돌며 총기로 8명을 살해했다. 희생자 중 6명이 아시안 여성이었다. 사건 직후 인터뷰에서 경찰은 “롱에게 ‘나쁜 날’(bad day)이었던 것 같다”라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공식 브리핑에서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성 중독을 앓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혐오범죄(hate crime)가 아닌 우발적 범죄라는 것이다. ‘아시안 혐오를 중단하라!’ ‘나는 너의 페티시 대상이 아니다!’를 외치는 연대운동이 곳곳에서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경찰, 사법부, 대통령을 비롯한 그 어떤 국가 공권력도 이것이 혐오범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애틀랜타 아시안 여성 총기 살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미국은 현재 3천만명에 달하는 코로나 확진자와 54만명이 넘는 사망자 수를 기록하고 있다. 전 행정부의 늑장대응으로 2020년 초기 방역이 잘 이뤄지지 않았고, 이는 코로나19의 빠른 확산으로 이어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체계적 대응 정책을 마련하기보다 코로나19를 ‘차이나 바이러스’로 호명하며 중국 탓을 하기 바빴다. 미디어 또한 여기에 힘을 실어주었다. 코로나19에 관한 보도에 내용과 무관하게 차이나타운이나 아시안의 사진을 삽입하는가 하면, 바이러스 근원지로서의 중국을 강조함으로써 코로나19의 아시안화에 일조했다. 인종화된 바이러스 담론은 이내 아시안에 대한 폭력과 혐오로 이어졌다. 2020년 3월 19일부터 2021년 2월 28일 사이에 총 3,795건의 아시안 대상 혐오범죄가 보고되었고, 피해자가 여성인 사례가 남성에 비해 2.3배 높게 나타났다.

 

아시안을 향한 인종화·젠더화·병리화된 차별과 혐오는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이것의 바탕에는 미국의 뿌리깊은 제국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성차별의 역사가 있다.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영토 및 문화의 식민지화를 통해 미합중국을 세운 유럽계 백인 이민자들은 흑인, 원주민, 유색인종을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타자화함으로써 주류 권력을 공고화해왔다. 법적으로 아시안은 이들이 발동한 반(反)이민정책의 첫 대상이었다. 1882년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은 법으로 특정 인종/민족의 노동 이주를 금지한 대표적인 사례다. 아시안에 대한 유럽계 백인 이민자들의 두려움 및 멸시는 아시안을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불결하여 전염병을 옮기거나 신뢰할 수 없는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는 옐로 페릴(Yellow Peril, 황화론) 현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20세기 초의 대공황은 중국계 저임금 노동자들이 백인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프레임을 형성하며 아시안에 대한 차별을 더욱 부추겼고 이로 인한 물리적 폭력과 충돌이 곳곳에서 보고되었다. 아시안의 동등한 사회 성원권을 인정하지 않는 법안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대상을 수용소에 격리 구금하도록 한 행정명령 9066호의 발효로 약 12만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1942년부터 1946년까지 감금되었다. 이들 중 8만명이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 혹은 3세였다는 점은 아시안이 법적 체류 지위나 기간에 무관하게 ‘영원한 이방인’(forever foreigner)으로 여겨졌음을 극단적으로 반영한다.

 

아시안 여성을 향한 차별은 더욱 다층적인 형태로 형성되어왔다. 인종주의, 성차별, 식민주의의 교차점에서 아시안 여성은 인종화된 여성혐오와 아시안 페티시의 대상이 되어왔다. 앞서 언급한 중국인 배제법보다 먼저 발효된 1875년 페이지법(Page Act)은 아시안 여성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성매매업에 종사하거나 도덕적으로 완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중국인 여성의 미 입국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시안 여성을 향한 성애화와 인종화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벌이거나 가담한 전쟁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이들을 야만적인 아시안 남성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존재 또는 이국적이고 성적으로 유혹적이며 온순한 존재로 대상화함으로써 미국의 전시폭력 및 성범죄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할리우드 대중문화나 팝 음악계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최근까지도 아시안 여성은 여전히 보이지 않거나 가시화되더라도 인종화된 성애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데 그치곤 했다.

 

애틀랜타 아시안 여성 희생자들이 성매매 종사자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일련의 소란은 아시안 여성의 젠더 및 성매매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경찰이 총기 사건의 가해자가 성 중독을 앓고 있었으며 최근 이런 중독을 근절하고 싶어했다는 점을 강조하자, 많은 언론은 이로 인해 성매매업소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던 여성들이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재미 한인 언론과 한국의 언론도 이 흐름에 가담했다. ‘은밀하게 성매매가 이뤄지는 아시안 마사지숍’에 관한 보도를 내보내기 바빴고,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이것을 한인사회의 수치로 여기거나 ‘성매매 여성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자신들이 감수한 일 아니냐’라는 코멘트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희생자 가족들의 사연이 보도되자 이같은 여론은 반전을 맞이했다. 성매매 종사자 또는 그 협력자가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 대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던 위대한 시민’ 또는 ‘자식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헌신적인 어머니’에 방점이 찍히기 시작한 것이다. 고인에 대한 이같은 재현은 모범적 시민으로서의 아시안이라는 인종화된 프레임에,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존재라는 가부장제의 성차별적 담론에 힘을 실어줄 뿐이다. 성매매 여성인가 아닌가의 여부와 무관하게, 범죄의 대상이 되어도 마땅한 목숨이란 없다. 여성에 대한 이중잣대가 여실히 드러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사건 발생 이후, 아시안 혐오와 성차별 및 백인우월주의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급증한 아시안 혐오범죄와 흑인 생명 운동(Black Lives Matter)의 가속화 속에서 이미 다양한 인종적 배경의 연대운동이 확산되어오던 터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수십년 동안 인종 정의(racial justice)를 위해 싸워왔던 수많은 이들의 운동적 유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국 곳곳의 추모 현장에서, 거리 집회에서, 또 온라인 공간에서 지금 사람들은 인종, 젠더, 성정체성, 법적 체류 지위의 교차점에서 형성된 구조화된 차별을 직시하고 그 재생산을 멈추자고 외치고 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팬데믹 속에서, 경찰 공권력이 옹호하는 혐오살인의 행렬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희망과 연대의 움직임이 더욱 크게 번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애틀랜타 총기 살인은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코로나19와 중국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거나 국내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코로나19 진단검사를 받도록 한 일은 한국 또한 얼마나 비한국계 집단에 대해 배타적인 사회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한국의 미등록 여성 이주노동자 및 결혼 이주여성들이 계급, 인종, 젠더가 낳은 일상적 폭력에 노출되어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주민뿐이겠는가. 여성, 노동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 장애인 등 한국사회에서 ‘타자’로 간주된 수많은 이들이 차별과 혐오의 일상성에 공감할 것이다. 애틀랜타 총기 사건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과 열기, 분노가 이토록 뜨거울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회 내의 차별과 혐오로 인해 목숨을 잃어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간 우리는 얼마나 가슴으로 공감하고 연대해왔는가 하고 말이다.

 

애틀랜타 총기 사건은 우리 안의 혐오를 비추는 또다른 거울일지도 모른다. 애틀랜타로 향하는 슬픔과 분노, 안타까움을 지금 우리 각자가 선 곳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차별을 돌아보게 하는 동력으로 전환하고, 그럼으로써 모두의 존엄과 해방을 위한 실천을 고민하고 연대를 확장하는 힘으로 키워낼 수 있어야 한다. 이달 7일 경북 구미에서는 베트남계 이주여성이 남편에 의해 살해당했다. 앞서 3일에는 트랜스젠더인 변희수 전 하사가 세상을 떠났다. 여성을, 이주자를, 주류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 속하지 않는 이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회에서 그 누구도 존엄하게 살 수 없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이름들, 우리가 거듭 부르고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무엇인가를 질문해본다.

 

정가영 / UC 데이비스 아시안아메리칸학과 교수

2021.3.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