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전무후무한 춤꾼 이애주 선생을 기리며
전무후무하다. 이 땅에서 춤을 살다 간 인물 중에서, 이애주(李愛珠, 1947년 10월 11일~2021년 5월 10일)와 비슷한 사람은 없다. 그에게서 한발짝 떨어져서 꼬박 40년을 지켜본 내 눈에 비친 이애주는 그렇다.
일상의 이애주와 춤추는 이애주는 분리해야 한다. 회의나 자문, 대담 등으로 만난 이애주는 언제나 ‘까칠한’ 모습이었다. 대세에 지장이 없는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매우 집요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를 만났을 때 한번도 편하고 즐거웠던 적은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는 늘 나 또는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화두처럼 던져주었고, 이것만큼은 꼭 알아야 한다고 무언가를 역설하곤 했다. 그런 것들 중에는 내 삶에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 것들이 있다. 분명 이애주는 ‘알다가도 모를’ 남다른 사람이다.
이애주와의 첫 만남
잠시 내 얘기를 좀 해야겠다. 『창작과비평』을 통해서 문순태의 소설 「징소리」(1978년 겨울호)를 만났다. 나는 이걸 꼭 음악극 또는 총체극으로 만들고자 했다. 1985년 가을, 당시 문화관 소극장에서 동명의 극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때 서울대 춤동아리 ‘한사위’의 도움을 받았다. 한사위의 지도교수가 이애주였다. 당시 탈춤을 얼추 배웠던 나는, 이애주 교수에게서 한국무용실기를 배우고 싶었다. 이른바 ‘민족춤’ ‘민중춤’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었다. 1986년 대학교 4학년이던 나는 부푼 꿈을 안고 이애주 교수를 학교에서 첫 대면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이었다. 무용실기실에서의 이애주는 ‘민족’과 ‘민중’이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않았다. 내가 한 학기동안 배운 춤은 궁중무용(정재)인 「춘앵전」이었다. 춤을 매개로 해서 흥과 신명의 최대치를 경험하고자 한 나의 욕망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춤실기 강의였지만, 그에게서 오히려 ‘우주’ ‘기’ 같은 단어와 개념만을 접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학기를 인내로 버틴 결과, 나는 한국춤의 정신과 원리를 알 수 있었고 이애주라는 춤꾼을 단지 ‘무용사회학’적인 영역에만 둘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의 춤은 ‘무용인류학’적으로 접근해야 하고, 이를 통해서 한국춤의 원리와 역사적 전개를 풀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전통에 뿌리를 두고 창조의 세계로
이애주는 어릴 때부터 춤에 재지가 있었다. 초등학생인 이애주의 모습이 당시 일간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교동초등학교에서부터 무용을 시작했는데, 학교와 집 근처에 국립국악원(서울 운니동)이 있었던 것은 매우 행운이었다. 이애주의 어머니가 어린 딸을 국립국악원에 데리고 간 것은 ‘신의 한수’였다. 그는 당시 어린이들이 가는 무용학원이나 신무용 계통의 춤과는 일정 거리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이애주는 국립국악원이 생긴 이래 가장 어린 수강생이 아니었을까? 그는 이때부터 외형적인 춤보다는 춤의 내면을 알게 되었을 것 같다. 춤에 있어서의 감성은 논리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를 배우게 된 것 같다. 이애주는 어린 시절부터 다른 무용소녀들과는 다른 작품으로 무용콩쿠르에 참여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의 첫번째 춤 스승인 김보남(국립국악원)이 세상을 떠난 후, 이애주는 한영숙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춤세계를 확장해간다. 사실 그때 한영숙 선생은 건강상 정신상 춤에 몰두했던 시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애주는 스승의 춤 세계에 더욱 깊게 다가갔다.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긴 뒤 전수자를 키워내고 그 전수자들에게 발표 기회를 주면서 등수를 매기던 시절이 있었다(1970~71년). 이때 모든 전수자 중에서 이애주는 언제나 1등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전수생활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이런 결실을 확연하게 보여준 것이 「한영숙류 이애주 전통무용」(1983.8.29. 공간사랑)이었다. 청출어람이라는 말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공연으로 누구보다 스승 한영숙이 인정하는 무대였다. 명무의 첫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애주의 내면에는 세명의 할아버지가 있었던 것 같다. 먼저 스승인 한영숙의 할아버지이자 일제강점기 한국의 근대춤을 완성한 한성준이다. 일제강점기 대세였던 신무용과 달리 ‘전통’에 뿌리를 두고 ‘창조’의 세계에 다가간 이다. 두번째는 김보남이다. 이애주 춤의 외형은 근대지향적·민중지향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그의 춤 철학과 미학에서 유교적 가치관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이애주를 ‘전무후무’하다고 평가하는 까닭도 이러한 지향성에 있다. 세번째는 영가무도(詠歌舞蹈)의 김일부이다. 이애주는 맥이 끊긴 영가무도를 행해 갔다. 춤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늘여서 표현한 노래 영가와 관련이 있고, 이처럼 영가 속에서 움직임과 춤이 만들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성원리라는 게 이애주 춤의 기본이다.
이 땅에서 춤을 전공으로 삼은 사람 중에 이처럼 춤 철학에 집요하게 매달린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는 단지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고자 애를 썼다. 이것이 민주화시대에는 ‘시국춤’으로, 이후에는 ‘생명춤’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훗날 이애주가 이른바 ‘시국춤’을 출 때에도, 무용계와 문화계가 이애주에게 그 어떤 흠집을 내기 어려웠던 것은, 그가 아주 출중한 전통의 계승자였기에 그렇다. 또한 이런 연장선으로 그는 무형문화재 최고의 위치인 ‘인간문화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애주 춤의 통시성과 공시성
이애주에게는 늘 두가지 목적성이 있었다. 하나는 자기 춤의 ‘통시성’이다. 자신의 춤이 어떤 계보를 잇고 있는지, 그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의미를 살렸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춤의 ‘공시성’이다. 자신의 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예술가 또는 시민적 자각이다. 이애주의 춤이 이른바 ‘시국춤’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훗날에 그가 자신의 춤의 가치를 우주와 자연의 조화를 담은 ‘생명춤’으로서 강조했던 것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여러 부조리와도 연관이 밀접하다. 통시적인 맥락에서의 ‘춤사상’의 확립과 공시적인 맥락에서의 ‘춤꾼’의 자세, 이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작용하면서 이애주라는 무인의 나이테를 형성한 것이고, 나아가 결국 이애주라는 춤의 거목을 가능케 한 것이다.
지난해 이애주는 매우 큰일을 했다. 자신의 춤 스승인 한영숙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큰 공연과 학술대회를 병행했다. 아마 무리가 많았을 텐데도 이 큰 일정을 모두 잘 마친 이애주에게, 대한민국 문화계는 큰 박수를 보냈다.
이제 이애주는 이승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다 끝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지금 이 시대의 대한민국은 더이상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을까? 저기 어딘가에 존재하는 상제님을 만나고 그의 혜안을 보고 싶었을까? 이애주는 이렇게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다.
이애주가 승무를 출 때의 모습이 그렇듯이, 이애주가 우리에게 남겨준 이미지와 메시지는 아주 분명하다.
‘하늘과 땅이 맑고 밝아(天地淸明) 해와 달이 빛이 나(日月光華)’
전무후무한 춤꾼이 이 땅을 홀연히 떠났다. 세월이 좀 흐른 후, 이 땅에 또다시 이애주와 같은 춤꾼이 나타날까? 그러길 바란다. 이애주를 알건 모르건, 우호적이건 배타적이건 간에 이애주의 춤의 이미지와 메시지는 아주 오래도록 이 땅의 사람들 마음에 존재하리라.
윤중강 / 문화재위원, 공연평론가
2021.5.12.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