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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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탄소중립, 목표 아닌 넘어서야 할 벽

김상현

김상현

문재인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의 행보가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진보적 개혁 추진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안은 기후위기가 아닐까 싶다. 아니, 사실 그간 정부여당이 보여온 턱없이 부족한 인식과 대처는 최소한의 기본도 지켜지지 않는 상황을 개탄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기후위기에 대한 진보적 접근의 필요성이 논의되는 것 자체를 제한해왔다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 문재인정부 2년 차인 2018년, 인천에서 개최된 제48차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 총회에서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가 채택되었다. 이 보고서는 현재와 같은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되어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 상승한다면 회복 불가능한 생태계 교란이 발생할 위험이 크다고 보며, 인류의 건강, 안전, 식량, 물, 주거 및 생계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어서 보고서는 지구의 기온 상승을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2030년까지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10년 대비 45퍼센트 감축해야 하며, 2050년까지 ‘탄소중립’(carbon neutrality), 즉 ‘순 제로’(net zero) 탄소배출을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산화탄소 총배출량, 1인당 배출량 및 배출량 증가율에서 세계 수위를 차지하는 한국의 감축 책임은 그보다 컸으면 컸지, 적지 않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보고서의 권고를 철저히 무시해왔다. 빠리협정에 따라 2020년 말 정부가 UN 기후변화협약 사무국에 제출한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는 2017년 배출량 대비 24.4퍼센트 감축을 제시했다. 이는 2010년 대비 18.5퍼센트 감축에 불과하고, 표현만 바뀌었지 2015년 박근혜정부나 2009년 이명박정부가 발표한 목표와 동일한 수준의 것이었다. 그뿐 아니다. 대선과 총선에서 탈석탄을 공약한 정부여당은 탄소배출량이 가장 높은 석탄발전소 7기를 애초 계획대로 건설하도록 허용했다. 해외 석탄발전 수출과 그에 대한 공적금융 지원을 고수하다가 국내외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뒤늦게 신규 지원 중단을 선언했으나 이미 결정된 사업이라는 점을 들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으로의 석탄발전 수출은 여전히 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항공기 운항 증가와 대규모 토목건설에서 배출될 온실가스 문제를 외면한 채 선거 득표를 위해 무리하게 추진되고 있는 신공항 계획들은 또 어떠한가?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부여당의 기후정책에 대한 비판은 온실가스 배출 감축 의지의 결여 및 미약하기 짝이 없는 감축 목표를 질타하는 데 주로 초점이 맞춰져왔다. 물론 그와 같은 비판은 매우 타당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여당의 현 기후위기 대응 방식에 내재한, 또다른 심각하고 근원적인 결함들이 시야에서 가려질 위험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최소 55퍼센트 감축하기로 결정했는데, 문정부가 이처럼 큰 폭으로 목표를 조정하여 탄소중립 의지를 분명하게 천명한다면 어떠할 것인가? 마침내 제대로 된 기후위기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답은 그리 간단치 않다. IPCC는 ‘탄소중립’을 “인간 활동에 기인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인위적인 이산화탄소 제거에 의해 지구적으로 균형을 이루게 되어 ‘순 제로’ 배출이 달성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얼핏 당연한 얘기로 보이지만 실은 특정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방향성을 내포한 개념이다. 이는 기후위기 대응을 시장주의와 기술중심주의로 제한하고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 개혁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기후위기는 온실가스의 환경적 외부효과를 시장가격에 내부화하는 시장주의적 탄소가격제, 그에 기반한 ‘탄소상쇄’, 그리고 기술적 해법을 통해 해결하면 되는 것으로 전제된다.

 

이를테면 온실가스를 배출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온실가스를 흡수할 것으로 인정되는 사업에 투자하거나, 배출에 상응하는 상쇄배출권을 탄소시장에서 구매한다면 ‘순 배출’이 감축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 따라 산림·습지 보호와 재조림 사업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고 있으며, 탄소배출권에 이어 상쇄배출권 시장이 활성화되고 그와 연계된 파생 금융상품들도 경쟁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UN의 ‘산림파괴와 산림황폐화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 감축’(Reducing Emissions from Deforestation and Forest Degradation, REDD) 프로그램과 이를 확장한 REDD+도 그 연장선에 있다. 또한 탄소 포집·활용·저장과 같은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온실가스 배출을 유지하면서도 ‘순 배출’량을 감축할 수 있게 된다. 탄소중립의 틀이 유지되는 한, 직접적인 탈탄소화 전환에 투입되어야 할 많은 자원과 노력이 시장·기술 중심 탄소상쇄 사업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온실가스 흡수원의 능력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며 이를 측정하는 데는 높은 과학적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일정량의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상응하는 활동들을 확인·분류하고 정량화·표준화하여 ‘순 배출’량을 추정하거나 시장가격으로 환산하는 과정의 불확실성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탄소중립을 표방하지만, 정작 탄소의 중립화가 예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상쇄배출권 시장을 겨냥한 인위적인 산림·습지 보호와 재조림 사업은 자연과 토지의 상품화, 지역 생태계 파괴, 지역 민중들의 공동체적 삶 붕괴 등 심각한 부정적 파급효과를 낳을 수 있으며, 실제 그에 맞선 저항과 투쟁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탄소 포집·활용·저장 기술 역시 다를 바 없다. 기술적으로도 언제 상용화될 수 있을지 불투명할 뿐 아니라 이산화탄소 장기 저장의 비현실성과 안전성, 주변 토양·물·식물의 산성화 등 잠재적인 환경 영향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구의 친구들 국제본부’(Friends of the Earth International), ‘제3세계 네트워크’(Third World Network)를 비롯한 30여개 국제 사회운동 조직이 결성한 연대체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글로벌 캠페인’(Global Campaign to Demand Climate Justice)이 ‘탄소중립’ 및 ‘순 제로’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이들은 ‘탄소중립’ 개념이 화석연료 산업자본, 탄소시장으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취하고 있는 금융자본,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각국 정부들의 책임을 회피·지연시키고 그로 인한 부담을 대중에게 전가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탄소중립이 '그린워싱'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사회적·경제적·환경적 불평등과 생태 파괴를 야기해온 착취적·추출적 정치경제체제와 사회구조를 그대로 방기한 채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시장주의와 기술중심주의 접근에 의존해서는 기후위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기업의 이윤 창출과 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통해 GDP로 상징되는 경제의 외형적 성장을 끊임없이 추구함으로써 한국을 선진강국 대열에 진입시켜야 한다는 성장주의와 개발민족주의의 비전을 앞세워온 정부여당이 ‘탄소중립’의 한계를 성찰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빠리협정이 요구하는 바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감축 목표를 상향 조정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류적 접근을 강하게 비판하고 압박해야 할 환경운동 일각에서 일종의 ‘흑묘백묘론’을 취하며 시장주의와 기술중심주의의 수용을 정당화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적극 설파하고 있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시장주의와 기술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해왔던 기후운동과 진보진영에서조차  ‘탄소중립’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그러한 보수적 흐름의 확산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 ‘탄소중립’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더욱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정치경제체제와 사회구조로의 전환을 위해 넘어서야만 할 벽이라는 점이 짚어질 필요가 있다.

 

김상현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교수

2021.6.23.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