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제헌절에 톺아보는 권력구조 개헌론
반복되는 제헌절의 아이러니
제73주년 제헌절도 예외가 못될 듯싶다. 헌법제정을 기념하는 생일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헌법개정론 말이다. 소위 ‘대권’주자들이 개헌을 정책공약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최종적 헌법개정권을 가지는 국민들의 반응은 그리 흔쾌하지 않다. 물론 여론조사 결과로는 개헌에 공감하는 비율이 낮지 않다. 하지만 수박 겉핥기식 여론조사는 백가쟁명(百家爭鳴) 개헌론의 본질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의 구체적 문제에 이르면 절대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당장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는 국민 일반의 절박성이 높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어온 대한국민의 집단지성이 개헌론에서도 발휘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정치권발 권력구조 개헌론의 실상
1987년 민주화에 의해 탄생한 현행 헌법은 공포 직후부터 개헌론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정치권에선 권력구조를 내각제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다. 김영삼정부는 내각제 밀약에 기초한 3당합당의 결과물이었다. 김대중정부의 탄생 또한 내각제를 고리로 한 DJP연합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 노무현대통령도 사실상 내각제로 운용될 수 있는 대선-총선 연계 원포인트 개헌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명박-박근혜정부 시기에는 국회에서 여야를 아우르는 개헌연구모임을 통해 ‘내각제형 이원정부제’가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공론화되었고, 탄핵 위기에 직면했던 박근혜대통령은 마지막 승부수로 이 개헌론을 수용하려 했다가 무산되었다.
모든 정파가 2018년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의 동시 실시에 합의해 개헌특위까지 꾸렸던 제20대 국회에서 개헌이 불발된 것도 다양한 개헌 주장의 원심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원인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내각제형 이원정부제를 고집하는 여의도정치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권자 국민은 정치권의 권력구조 개헌론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공화제를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 ‘국회의원의, 국회의원에 의한, 국회의원을 위한’ 권력구조로 퇴행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간파하게 되었다.
제헌헌법의 민주공화정신과 헌법 무시의 헌정사
무엇보다 그간의 이원정부제 권력구조 개헌론에서 소홀히 되었던 것은 헌법정신에 대한 오해였다. 1948년 제헌헌법은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혼합한 한국형 민주공화제였다. 집행권도 의회권도 독주하지 못하도록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공화정신을 핵심으로 하였다. 대통령제를 채택하면서도 집행권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국회에서 간선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정의 주요 현안은 국무원에서 의결하도록 하였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대통령 직선제가 원칙이 되었으나 미국 연방헌법과 달리 행정권은 대통령 1인이 아니라 국무총리, 국무회의 등 독자적 헌법기관들의 집합체에 주어져서 대통령을 절차적으로 견제하고 균형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국회가 행정부처를 법률로 결정하고 행정권의 제2인자인 국무총리의 임명에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체제로 발전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전, 제헌헌법의 공화정신이 몰각되어 대통령 독재라는 폐습을 낳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폐습은 헌법을 무시하는 정치제도와 정치문화의 관성에 의해 제왕적 대통령 현상이 지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공화제의 국지적 위기가 반복되는 불안정성이 지속된 근본원인은 헌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원정부제 권력구조 개헌론자들은 현행 헌법이라도 잘 지키면서 입법이나 문화의 개조를 통해 실질적인 정치개혁을 이루는 방식보다는 애꿎은 헌법제도를 또 바꾸자고 인과관계가 단절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진화하는 한국형 민주공화제
이원정부제 권력구조 개헌론자들이 놓치고 있는 또다른 현실은 이러한 권위주의시대의 독재적 대통령의 유산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30여년간 권력의 분산과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강조하는 제헌헌법의 정신은 점진적으로 발전적 진화를 거듭해왔다는 점이다. 지금도 모든 사안을 대통령 1인의 문제로 전가하는 편집증이 여전하지만 정치현실은 대통령의 지위를 급격히 합리화하고 의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대표적 예가 국무총리에 대한 국회 임명동의제이다. 유신체제를 연상시키는 국정농단을 서슴지 않았던 박근혜대통령마저도 재임 중 국무총리를 뜻대로 경질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세월호사태에 마땅한 책임을 져야 했던 정홍원 총리는 물론이고 국정농단의 방탄책임을 물었던 황교안 총리가 인사파동 끝에 유임되어 대통령권한대행까지 역임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개헌론자들이 추구하는 국무총리 국회 선출제에 버금가는 ‘정치인 총리’와 국회의원 입각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통제력 또한 강화되고 있다. 문재인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했던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의 정치적 항명으로 권력누수를 감수해야 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개별적 정치적 현상 자체에 대한 평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그 변화는 헌법이 추구했던 공화적 권력균형을 제대로 달성해가는 진통 과정일 수 있다. 주권자 국민의 정치적 영향력을 왜소하게 만들거나 새로운 헌법갈등의 빌미가 될 수도 있는 인위적인 권력구조의 개헌이 아니더라도 민주공화적 정치문화와 제도의 진화로 개헌론의 기본 목적이 상당 부분 달성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현행 헌법에서 발전적 진화만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개헌 사안은 따로 있다. 예컨대, 성역화되어 국민참여를 통한 민주적 통제마저 무력화할 여지를 둠으로써 사법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사법권에 관한 장(제5장)이나 지방분권을 통해 더욱 강화된 민주공화제를 실현하기에는 너무나도 빈약한 지방자치에 관한 장(제8장)이다. 한편 현재 가장 부족하며 개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회중심 정치체제로의 진화에 걸맞게 국회의 신뢰를 높이고 국민의 정치선택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정개혁이나 정당민주화, ‘반(反)정치’와 ‘탈(脫)정치’로 도피할 수 있는 주권자 국민의 정치참여를 촉진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 등 정치관계법제의 개혁이다.
제헌절에 되새기는 정치개혁의 올바른 방향
전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던져준 중요한 교훈이 있다. 우리가 그동안 전범으로 삼아온 서구민주체제가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후 유일하게 민주화와 시장경제를 최고 수준으로 달성한 우리나라는 어느덧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안정성과 효과성을 가진 우리 고유의 민주공화체제를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헌법의 제정을 자축하는 제헌절을 맞아 한국형 민주공화제의 디딤돌을 놓은 제헌정신을 되새기면서 제헌헌법의 권력균형론에 입각하여 권력구조 개헌론을 넘어서 우리의 민주공화체제를 더욱 발전적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올바르고 현실적인 정치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할 시점이다.
김종철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1.7.1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