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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난민에게 곁을 내어줄 수 있는가?

구기연

구기연

‘미라클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지난 8월 2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현지인 조력자와 가족 377명이 기적처럼 한국에 도착했다. 이들은 수년간 주아프간 한국대사관, 한국병원, 직업훈련원 등에서 근무한 이들의 가족이었다. 특히 한국에 도착한 아프간 현지인들 중 180명이 10살 이하의 어린이, 영유아라는 사실은 놀랍고 또한 감동적이었다. 그들이 무사히 한국에 도착한 후, 연이은 아프간 내 테러 소식을 들으며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들의 도착을 전하는 뉴스 속 문장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들은 난민이 아니라, 특별기여자로서 국내에 들어오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특별기여자’가 아닌, 이후에 들어올 혹은 이미 한국에 있는 아프간 사람들은 ‘난민’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이미 한국사회는 2018년 5월에 도착한 500여명의 예멘 난민 사태—‘사태’라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문제적이다—로 무슬림 난민 문제를 경험한 바 있다. 미디어로만 접해왔던 ‘난민’, 그중에서도 ‘무슬림 난민’이 한국사회의 현실로 훌쩍 다가왔다. 대규모 난민을 받아본 적 없는 한국사회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국 내 이슬람포비아를 연구해온 필자로서는 한국사회의 평범한 ‘국민’들이 무슬림 난민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를 펼치는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한국사회의 이슬람 혐오는 예상보다 더 격렬했다. 일부 한국인은 상상의 공포를 넘어 실체적인 두려움을 갖고 그들에게 적개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낯선 문화가 만나면서 빚어지는 마찰만으로 보긴 어려웠다. 혐오 담론이 의도를 가진 채 조직적으로 전파되는 정황이 곳곳에서 목격됐기 때문이다. 예멘 난민 이슈가 일어난 지 3년, 그동안 한국사회의 종교계, 학계, 언론계, 정치권 그리고 정부에서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때로는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 덕분에 이번처럼 즉각적이고 인도적인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결정이 자칫 ‘한국의 국익에 기여하지 않은’ 난민들을 배제하는 기제로 쓰이지는 않을지 우려되기도 한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는 이들 ‘무슬림’들을 불안과 때로는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슬람 사원을 둘러싼 마찰을 겪고 있는 대구의 한 지역은 무슬림을 향한 욕설과 날선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현수막들이 골목에 걸려 있다.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둘러싼 갈등으로 법정 공방까지 오가는 현실에서 탈레반의 아프간 복귀 소식을 들었을 때, 한국사회 내 이슬람포비아가 다시 한번 요동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다. 중동과 이슬람권에서의 테러나 전쟁 소식이 한국사회에서는 루머와 혐오의 직간접적인 근거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미 정착한 무슬림 이주민들이나 단기 체류자들에게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라며 경계의 선을 긋고서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격앙된 일부 국민들의 목소리에 한국사회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고민이 커져간다.

 

이런 고민들은 개인적인 차원으로 남아선 안 된다. 지역공동체, 학계, 언론,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미국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무슬림이 우리와 다르지 않으며 미국사회가 그들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누스바움은 이와 같은 두려움이 “선천적 경향과 깊이 내재된 심리적 경험 그리고 정치적 수사에 대한 반응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타인에 대한 연민』, RHK 2020)이라고 분석한다. 타자를 ‘악마화’하는 작업은 너무나 쉽게 ‘우리’를 ‘국민’으로 범주화해주지만, 이와 같은 배제와 차별은 더 깊은 혐오를 야기할 뿐이다. 악마화하고 타자화하는 과정은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용이하게 사용되며 많은 사회에서 ‘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가 경험한 난민에 대한 인종화 문제는 그들의 모빌리티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복기해야할 지점이 있다. 사회학자 미미 쉘러는 ‘모빌리티 정의’(Mobility Justice)라는 개념을 통해 국경을 넘는 이주민, 난민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바 있다. 모빌리티 정의의 관점에서 ‘난민’ 개념을 보면, 그들의 모빌리티 권리는 여행자나 일부 특권층의 이동권과는 다른 결을 드러내고 있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난민들의 모빌리티는 당연시되지 않으며 빈번히 부정당한다. 모빌리티의 부정(否定)은 도시 규모에서 멈추지 않고 국가적·초국가적 차원으로 연장된다. 국가가 국경이라는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이동을 통제하는 중에 국경을 몰래 넘는 잠재적 침입자들은 바다나 사막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모빌리티 정의 논의는 촘촘히 연결된 주체의 이동성과 그 정치성에 대한 중첩적인 결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이동하는 자들의 미래와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고민의 출발점이다. 초국가적인 모빌리티가 갑작스럽게 중지된 팬데믹 이후의 시간 앞에서, 또 새로운 모빌리티의 형태와 모빌리티 정치가 실현될 가까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한국사회에서 이 가치와 개념들은 계속 검토되고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곁을 내어줄 수 있을까? 먼저 무슬림 난민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혐오를 거두고 환대와 연대의 정신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 난민=무슬림=테러리스트’와 같은 그릇된 일반화에서 비롯한 부정적인 편견을 걷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낮선 그들’을 향한 치우친 생각들의 균형을 잡기 위해 교육과정 및 언론매체 등을 통해 공부하고 공론화해야한다. 또한 ‘이슬람’이라는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다양한 글로벌 이슈들에 대한 개별적 분석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무슬림과 난민, 다른 인종에 대한 혐오와 배제, 차별을 적극적으로 끊어내지 못한다면, 그 혐오의 칼날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할 수 있다. 한국사회가 아프간 난민을 비롯한 무슬림에 대해 근거 없는 편견을 걷어내고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 우리의 곁을 내어줄 때 진정한 ‘미라클(기적)’ 작전이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구기연 /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2021.9.1.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