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리틀코리아’가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방법
“교장이 되었더구나?”
“네, 우리 학교는 런던 근처 뉴몰든에 있어요. 토요일에 한글을 가르치죠. 영국에 난민으로 정착한 북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6년 전에 세웠는데, 지금은 한국 부모님들도 아이들을 보내요. 학생들은 대부분 영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에요.”
“그거 아니? 나는 죽기 전에 북한 사람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단다.”
“한번 오세요. 우리 학생들에게 한국전쟁 경험을 이야기해주면 좋겠네요.”
지난 6월, 약속대로 우리는 한국전쟁 영국군 참전장병이었던 브라이언 호프(Brian Hough) 씨를 학교에 초대했다. 그는 그날, 한반도 남과 북이 고향인 어른들과 그의 아이들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고통받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위로했다. 한반도 학교에서도 언젠가 이런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그날을 기록한다.
1. 사진
그는 1950년대 한국을 찍은 사진들을 화면에 띄웠다. 가난한 한국이 거기에 있었다. 참전했던 대부분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18세에 징집된 국가의무병이었고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맨체스터 노동자 지구에서 자란 나는 가난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부산에서 도착해서 본 빈곤의 풍경과 냄새는 상상을 훨씬 초월했지.” 특히 어린이들이 겪은 고통을 상기했다. “병사들이 들판에서 밥을 먹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우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어. 네살쯤 되는 아이부터 열댓살 된 아이들까지 한 열명쯤 됐을까? 구걸하지도 않고 그냥 멀찍이 서 있었지. 미군 배식병이 말했어. 이 모습에 익숙해져야 할 거라고, 어딜 가나 이런 아이들이 있으니 괜히 먹을 것을 주지 말라고.” 그는 배고픈 아이들을 지금도 잊지 못해서, 맨체스터에서 어린이들을 돕는 자원봉사를 한다.
그날 사진에는 휴전의 모습도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아침에 휴전협정이 체결된다는 말을 들었어. 오늘밤 10시부터 전쟁을 중단한다는 거지. 그날 하루는 정말 긴장했어. 실수로라도 교전이 발생하면 그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겠어? 불과 300미터 앞에 참호를 파고 있었던 중국군도 마찬가지였겠지. 아주 적막하고 긴 하루였어. 다음 날 아침이 되었는데, 두 진영 사이 무인지대에 중국 병사들이 나타났어. 영국 병사들도 밖으로 나갔지. 우리는 악수를 하고 같이 담배를 피웠어. 맥주를 나누기도 했어. 어제까지 총을 쏘았던 사람들끼리 악수라니. 다들 집에 돌아간다고 좋아했지.” 그들의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2. 질문
아이들의 질문을 받았다. 사실 그가 오기 전, 우리는 걱정이 많았다. “적군을 죽여봤나요?” 브라이언은 영국 초등학교에서 강의를 하면 이 질문을 하는 남자아이가 꼭 하나는 있다고 했다. “이건 내가 제일 피하고 싶은 질문이야. 나는 우리 편의 용맹함을 내세워 전쟁을 미화하고 싶지 않거든. 사람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총 한방에 바로 쓰러져 죽지 않아. 아주 긴 고통 끝에 서서히 죽어가지. 아주 끔찍한 일이야. 나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 정말이야. 절대 영광스러운 것으로 포장해서는 안 돼.” 나는 이 질문을 아무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더욱이 학생 중에는 부모가 북한 사람인 아이들도 많다. 전쟁 당시의 브라이언에게 북한은 적이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정작 아이들은 이런 것을 물었다. “가슴에 단 메달은 뭐예요? 어떤 메달이 제일 좋아요? 나도 메달을 받았는데 우리 학교 것은 보라색이에요.” “왜 모자를 써요?” “지팡이는 왜 짚으세요?” 브라이언은 웃으며 답했다. “노인이 되면 걷는 게 불편하단다.”
행사 일주일 전, 학생들에게 한국전쟁에 대한 짧은 특강을 했다. 부모의 출신이 남한과 북한으로 나뉜 아이들이 같이 있는 교실에서 한국전쟁을 가르치려니 어려웠다. 한국 학생들에게 한국전쟁을 가르칠 때의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군과 유엔군의 항전’이라는 공식을 넘어서야 했다. 결국 한복판이 잘려 두동강 난 한반도가 그려진 지도를 찾아, 오랫동안 하나였던 나라가 둘로 나뉘게 된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는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8월 15일은 영국에서는 일본에 승리한 날(Victory over Japan Day)이지만, 한반도에서는 식민지 해방의 날이자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설명을 아이들이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적군을 죽여봤나요?”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사전교육이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믿고 싶다.
3. 헌화
영국 마을 중심가에는 흔히 전몰장병기념비가 있다. 주로 1·2차 세계대전 전사자를 기념하지만, 모든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인이 많이 살아서 ‘리틀코리아’라고 불리는 뉴몰든 역시 역 근처에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아래에는 희생자를 기억하는 붉은 양귀비(‘포피poppy’) 화환이 늘 놓여 있다. 뉴몰든과 인근 지역에는 북한 사람 800여명을 포함해서 ‘코리안’이 이만명쯤 살고 있다고 하는데, 뉴몰든의 기념비에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화환이 놓인 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역에서 내려서 학교에 갈 때마다 언젠가 우리 학교 이름으로 화환을 놓고 싶다고 바라곤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전몰장병기념비까지 행진했다. 브라이언이 선두에 서고 학생·학부모·교사가 뒤를 따랐다. 학생들은 직접 만든 포피 모양의 배너를 들었다. 배너에는 이런 글자를 새겼다. ‘한국전쟁’ ‘6월 25일’ ‘잊지 않는다’ ‘평화’ ‘일치’(통일Unification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치Unity라고 생각한다. 통일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일치나 화합은 언제 어디서든 노력해볼 수 있는 것이니).
행사 몇주 전부터 여러 기관에 소식을 알렸다. 이 행사가 전쟁과 한반도의 분단, 갈등으로 고통받은 ‘모든’ 분들을 기억하고 뉴몰든 지역의 평화로운 남북 공동체를 축하하는 자리라 안내하고 참석을 권유했더니 여러 곳에서 응답이 왔다. 뉴몰든이 위치한 킹스턴시(市) 경찰서에서는 경찰관 네명이 와 아이들이 행진할 때 건널목마다 차를 멈춰주었다. 행사장에는 킹스턴시 시장 부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박한 헌화 행사는 마이크도 내빈 인사도 없이 조용히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마지막에 브라이언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오늘 어린이들과 함께한 이 자리에 초대해주어서 영광입니다. 언젠가 코리아가 하나가 되기를, 지도에 더이상 ‘노스’(north)와 ‘싸우스’(south)로 표기되지 않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4. 포옹
한 학부모가 다가와서 브라이언에게 인사했다. “저는 북한에서 왔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인민군이었어요.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 살아생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죠. 오늘 여기서 당신을 이렇게 만나는군요…” 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브라이언이 악수한 그의 손을 잡아 당겨 품에 안았다. 젊은 아빠의 눈이 붉어졌다. 브라이언이 말했다. “너는 나의 적이 아니야, 친구.” 그의 울음은 눈에서 입으로 번졌다. 어른의 그런 울음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전쟁을 기억하고 평화를 바라며 행사를 잘 마친 뒤, BBC는 행사 영상을 7월 27일 정전협정일에 보도했다. 우리는 언젠가 정전이 종전으로 바뀌어 한국에서도 전쟁이 시작된 날이 아니라 끝난 날을 기념하기를, 멀리서 기원했다.
덧붙이며: 후에 브라이언에게 물어보았다. “살아생전 북한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고 하셨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니?” 그의 대답이었다.
이향규 / 런던한겨레학교 교장, 『후아유』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저자
2022.8.16.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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