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한국 명절은 뻐쳐요
겨울배추 심기 전날, 무이가 전화를 했다.
“이모, 낼 배추 심을 사람 일곱명이에요.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요.”
한달 전, 서른명의 일꾼이 필요하다고 무이한테 예약을 했다. 무이가 끌고 다니는 차는 열세명까지만 태울 수 있어서 우리 트럭까지 동원해 일꾼들을 싣고 오기로 했었다.
무이의 일방적인 통보에 눈앞이 캄캄했다. 배추 심는 날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배추를 다 심을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고 있던 차였다.
“혜진 엄마, 무슨 소리야! 한달 전에 예약했는데 이제 와서 사람이 없다니, 말도 안돼에!”
“이모, 낼 사람 없어.”
무이가 일꾼들을 다른 곳, 그러니까 친척이라든가 가깝게 지내는 사람한테 빼돌린 것이라 의심을 했다. 발등에 떨어진 불덩이가 너무 뜨거웠다. 나는 길길이 날뛰었다. 비명을 지르듯 무이한테 소리치고 악을 썼다. 약속을 지키라고.
겨울배추를 심는 9월 10~25일경에는 그야말로 비상이다. 태풍 영향으로 비가 잦은 시기인데다 사람이 집중적으로 많이 필요해서 일꾼 쟁탈전이 치열하다.
“첨 봤어, 첨 봐! 이모같이 징한 사람은 첨 봤어 참말로오. 내가 이모네 배추 다 심어준당께!”
태풍이 지나고 배추 다 심어준다고 해도 믿지 않고 계속 악을 써대는 내게 무이도 화가 났는지 그렇게 맞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배추를 심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중단했고 다음 날부터 사흘 동안 무이는 일꾼들을 데리고 와서 남은 배추를 다 심어줬다.
“어째 이모네 일만 하믄 비가 와. 다음에는 하늘에 제사 먼저 지내쇼잉.”
일을 마치고 가면서 무이가 나를 놀렸다. 무이의 말투는 이미 이곳 사람이었다. 봄에는 대파, 가을에는 겨울배추를 4년째 무이 일행이 심어주고 있다.
명절 얘기를 듣기 위해 무이를 만나려면 어디로 찾아가야 할까 고민이 앞섰다. 무이는 아주 바쁜 사람이라 일하는 들녘 어딘가로 물어물어 가야 하리라 예상했다. 한국의 여성 농민은 집에서 쉬는 날이 별로 없다. 무이는 남편과 자기 농사를 지으면서 일꾼들을 데리고 다른 농가의 일까지 하러 다닌다.
비가 오락가락해서 들일을 할 수 없는 날 무이네 집을 찾아갔다. 무이네 넓은 마당에는 붉은 고추가 한가득 널려 있었다. 건조기에 넣으려고 세척해놓은 고추를 굵은 빗줄기가 다시 씻고 있었다. 나도 고추 농사를 5년 지어봤지만 그렇게 크고 실한 고추는 처음 봤다. 고추 길이가 날씬한 오이만 했다. 무이가 남편과 지은 농사였다.
'혜진 엄마'로 불리는 슈아 무이는 마흔두살이고 8남매 중 맏이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지 18년 됐다. 여동생 한명도 4년 전에 이 지역의 남자와 결혼했고, 또다른 여동생 한명은 중국 사람과 결혼했다. 무이한테는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이 있다. 무이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같이 사는 시어머니가 아이들 밥을 챙겨주고 집안 살림을 해준다.
고추를 900평 밭에 심어서 거두기까지 하려면 땡볕에 온몸이 익다가 검게 타기 마련인데 무이는 얼굴을 비롯해 피부가 말갛다. 비결을 물으니 모자와 마스크를 두개씩 쓰고 온몸을 꽁꽁 감싼다고. 더워서 숨 막히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뜨겁단다.
무이가 데리고 다니는 베트남 일꾼들은 일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데, 그중에서도 무이는 으뜸으로 빠르다. 무이가 대파를 심을 때 보고 있으면 손놀림이 대충대충 가벼운데도 정확해 거의 달인이다. 그러니 대파나 배추 심을 시기에는 무이의 일정이 한달 넘게 꽉 짜여 있다.
무이한테 명절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었다. 하루나 이틀은 들일을 하지 않고 집안일을 한단다. 베트남에서 명절은 네가지 음식, 삶은 닭 한마리·떡·밥·과일 한접시씩 상에 올려서 간단하게 차례를 지내고 쉬거나 즐기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 한국에서는 나물과 생선을 세가지씩, 과일도 세종류를 준비하고 서너가지 부침과 송편까지 장만하니 너무 힘들다. 명절에는 다른 때 보다 일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다고. 즐거워서 기대감을 갖는 명절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날이다.
“한국 명절, 아이구우 뻐쳐뻐쳐!”(*뻐치다: '아주 고되다'는 뜻의 서남 방언.)
무이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하는 말이었다.
남편과 논에서 일할 때는 근처 횟집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곤 했는데 알로나는 그곳에서 음식 나르는 일을 했다.
“언니, 많이 힘들어.”
온몸에 펄을 묻힌 채 식당으로 들어가면 알로나가 웃어주면서 나를 위로했다. ‘언니 많이 힘들지?’라는 말을 그렇게 한 것이다.
50세인 알로나는 필리핀 여성이고 11남매 중 일곱째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마트에서 일을 했는데, 다니던 교회가 한국의 교회와 연결되어 한국 사람을 소개받아 결혼했다. 다섯명이 같이 결혼을 했는데 친구 한명도 함께 이 지역으로 왔다. 그 친구도 다른 식당에서 일을 한다. 친구 아이와 알로나 딸이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쉬는 날은 친구와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차를 몰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알로나에게는 고등학교 2학년 딸이 있고 남편은 작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병치레가 잦아 알로나가 식당 일을 해서 가계를 꾸려왔다. 식당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놓으면 남편의 병원비로 다 없어졌고, 부족할 때는 필리핀에 사는 친정언니한테 도움을 받았다.
결혼 후에 필리핀에는 세번 다녀왔는데, 81세인 친정어머니가 한국 커피를 무척 좋아하신다. 엄청 많이 사다드려도 다른 사람 주지 않고 혼자서 드신단다. 필리핀에 계신 어머니한테 영양제나 약을 보낼 때마다 커피를 아주 많이 싸야 한다.
알로나에게 한국 명절은 특별한 날이 아니다. 명절에도 식당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퇴근 후 같은 동네에서 따로 사는 시어머니를 도와드리는 정도다. 요즘 알로나는 중국집 주방에서 주방보조 일을 하고 있다. 아침에는 실업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8시까지 출근했다가 오후 8시에 퇴근하면서 딸을 데리고 들어온다. 딸은 자신의 속 얘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뭘 하고 싶은지 물을 때마다 생각이 바뀐다. 딸이 독립하게 되면 친정식구들이 있는 필리핀으로 갈 것 같다고 했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는데 ‘살다보니 괜찮아졌다’는 무이의 말을 들으면서 착잡했다. 무이의 남편은 다문화센터를 세금이나 축내는 가정파괴범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환경에서 무이의 한국생활이 괜찮아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무이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이라 한국말이 능숙했다. 반면에 알로나는 살림도 단출하고 식당 주방에서만 일을 해서인지 쓰는 한국말이 다양하지는 않았다.
정성숙 / 소설가, 농부
2022.9.13.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