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종전평화협정을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은 계속된다: 2022 울란바토르 프로세스 8차 대회를 다녀와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사실상 작동하기를 멈춘 이래 북미, 남북 관계가 악화일로를 겪고 있다. 특히 윤석열정부 들어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고 한미동맹과 군사훈련을 ‘정상화’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남북관계는 더 격렬한 강대강의 악순환 구도에 들어섰다. 미중 간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우끄라이나전쟁 이후 전세계적 차원에서 군사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지금, 한반도 평화의 전망은 더욱더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2022년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몽골 울란바토르 인근 테를지 국립공원에서 ‘울란바토르 프로세스’ 8차 대화가 개최되었다. 울란바토르 프로세스는 몽골의 시민단체이자 싱크탱크인 ‘블루배너’(Blue Banner)와 일본 토오꾜오에 본부를 둔 국제비영리단체로 ‘무장갈등예방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GPPAC, The Global Partnership for the Prevention of Armed Conflict) 동북아시아 위원회 사무국을 겸하고 있는 ‘피스보트’(peace boat)가 제안해 공동 주최해오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시아 비핵지대화를 촉진하고, 그 목표에 여성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참여와 역할을 높이기 위한 이 정례 대화 프로그램은 ‘민간 6자(혹은 6+1)회담’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다. 몽골의 단체가 정부의 협조를 받아 제공한 대화 공간에 남·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참가해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의 평화적 해결과 핵 위협 해소 방안을 논의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남한에서는 ‘참여연대’와 ‘평화를만드는여성회’가, 북한에서는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KNPC, Korean National Peace Committee)가 참여해왔다.
울란바토르 프로세스는 민간 주도의 분쟁해결 대화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민간단체’가 정례적으로 참여하는 거의 유일한 민간다자대화 프로그램이다. 이 대화 프로그램은 북한 KNPC가 2011년 초 GPPAC 동북아시아 위원회에 옵저버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천안함사건, 연평도사건이 연이어 일어난 직후였다. 이명박정부의 5·24조치로 남북 민간교류가 전면 중단된 상태에서 GPPAC 동북아회의는 남북 민간단체가 대화를 이어가는 유일한 통로로 기능했고, 2015년 울란바토르 프로세스로 공식화되었다. 이를 통로 삼아 2015년 ‘위민크로스디엠지’(Women Cross DMZ)에 관한 실무논의 대북 채널도 확보할 수 있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포함한 국제 여성참가단이 북한을 방문하고 DMZ를 통과해 남한을 방문함으로써 한반도 정전 상황에 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 운동은 그후 미국 의회를 상대로 평화협정 체결에 관한 입법운동을 추진하는 국제적인 캠페인(Korea Peace Now)의 주된 동력으로 작용했다.
2018년 4·27판문점선언과 6·12싱가포르공동성명 이후 울란바토르 프로세스도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2019년 8월 이후 대면회의를 개최하지 못했다. 그동안 남북, 북미, 미중 관계가 심각하게 후퇴하고 우끄라이나전쟁마저 일어나 급격히 악화되는 상황에서, 민간 차원의 갈등예방 대화는 큰 제약을 받은 것이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기간 동안 온라인 대화가 진행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울란바토르 프로세스 대화는 보다 안전하고 포용적인 대화의 장을 만들기 위해 ‘채텀하우스 룰’(Chatham House Rule, 토론 공간에서 자유롭게 토론하며 이후 누구든 그 요지를 전할 수 있되 구체적 발언내역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사전에 약속하는 대화방식)에 따라 진행해왔고 공식 대화 외에도 비공식 의사소통을 중시해왔기에, 온라인 토론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올해 대화는 3년 만에 처음 열린 비대면 대화였기에 참가자들의 기대가 컸다. 베이징 캘리포니아 홍콩 쿄오또 서울 타이뻬이 토오꾜오 울란바토르 블라지보스또끄 워싱턴DC 등 다양한 시민사회 배경을 가진 25명이 참가해 동북아시아 상황에 대한 정보와 의견을 나누었다. 북한 KNPC의 대면회의 참여가 단연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지만 아쉽게도 북측은 북한의 코로나 방역정책에 따라 참여하지 못하였다. 대신 서면으로 보내온 발언문에서 한국전쟁 이후 현재까지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상세히 열거하고,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일방적 제재에 대해 공동대응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비대면으로 만나 북측의 입장을 더 상세히 듣고 공식·비공식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북한이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참가자들은 위기를 맞고 있는 한반도 문제의 해법에 대해 다각도로 의견을 교환했다. 참가자들은 정부 간 군사주의적 접근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사람 중심, 예방 중심, 종전·관계개선 등 평화 우선 접근 원칙을 재확인했다. 대북 제재와 군사적 압박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의견을 나누었다. 참가자들은 한반도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2023년을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국제적으로 모아내는 계기로 삼자는 것에 공감하고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을 포함한 남한 시민사회의 계획에 적극 협력하자는 데 합의했다. 특히 GPPAC 동북아시아 위원회가 2023년 한반도 종전평화 캠페인이 개최하는 국제행동주간의 공동주최 그룹으로 참여하고, 이를 위해 북한을 포함한 울란바토르 프로세스 참가 단체들이 2023년 초 한반도 문제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기 위해 연말까지 초안을 회람하기로 한 점도 뜻깊다.
참가자들은 그밖에 코로나19 팬데믹, 기후위기 등의 새로운 위협과 우끄라이나를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무력 충돌, 국가 간 긴장고조와 군사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평화롭고 민주적인 공간의 축소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의견을 교환했다. 특히 이러한 양상이 동북아시아 평화와 핵 없는 세계를 향한 비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다수가 갈등 예방을 위한 노력과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노력이 연결될 필요성을 강조했다. 참가자들은 대화 중간에 시간을 내서 몽골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10억그루 나무 심기 캠페인’에 참여하기도 했다.
국가 간 관계가 악화되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교류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민간 차원의 노력과 계획이 발휘할 수 있는 효과에 대해 회의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국가 간 대화가 완벽하게 단절되었던 순간에도 민간의 노력이 대화의 숨통을 열고 가능성을 만들어왔음을 울란바토르 프로세스가 걸어온 길이 입증해주고 있다. 민간 차원의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대화 공간을 마련하고, 단절을 넘어 소통을 꾀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해볼 만한 실험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이태호 /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평화군축센터장
2022.10.11.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