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현대차 손해배상 판결의 의미와 노란봉투법
지난 6월 15일 대법원은 우리 노동운동사의 목에 박힌 잔가시 하나를 제거했다. ‘이제야’라 할 것이나,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청구와 막무가내의 가처분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옥죄던 기업의 폭력을 차단했다는 점에서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판결이 나왔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을 점거파업한 노동자들에 대해 일괄적인 공동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은 것이다.
대법원은 노동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기업의 손해를 관련된 조합원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떠넘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단언했다. 쟁의에 나선 것은 노조인 만큼 노조가 책임을 지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합이 결정한 쟁의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조합원들이 일일이 판단하면서 각자도생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단결권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또 노동조합의 의사결정이나 실행행위에 관여한 정도 등은 조합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만큼 그에 따라 배상책임이 할당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이유로 대법원은 노조와 더불어 개별 조합원에게 배상책임을 묻고자 할 때는 개개의 조합원이 노조에서 가지는 지위와 역할, 쟁의행위에 참여하게 된 경위 및 정도, 손해발생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불법행위한 경우 그 모두에게 연대책임을 묻는 민법 제760조의 규정은 노동조합의 쟁의행위에 관한 한 특별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연한 판결이다.
민법 제760조가 애초에 이런 부진정연대책임을 인정한 이유는 피해자의 보호를 손쉽게 하기 위함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해당 규정을 관철할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가 2002년 상호신용금고의 부실경영에 대해 모든 이사가 연대책임을 지도록 한 법률규정을 위헌이라 판단하면서 부실경영에 개입한 이사에게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 한 예이다. 손해를 야기한 사람만이 배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자기책임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결국 민법의 해석과 적용은 헌법의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헌법이 노동3권을 보장하며 노동자들을 특별히 보호하고 있다면, 그 정신은 민법 제760조의 해석에도 그대로 관철되어야 한다. 부진정연대책임으로 보호되는 것이 다름 아닌 자본권력을 가진 기업일 경우 그에 우선하여 노동자의 노동3권과 그들의 이익을 먼저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 그동안 대부분의 노동현장에서 민법 제760조는 기업의 손해를 보전하기 위한 제도로 이용되지 않았다. 쟁의행위에 들어간 조합원들에게 고액의 손배소송과 가처분을 걸었다가 그 협박을 이기지 못하여 전향하는 노동자들은 피고 목록에서 빼주는 식으로 노조와 쟁의행위를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동원되었을 뿐이다. 법의 이름으로 자본의 폭력이 가장 적나라하게 이루어지는 통로였던 것이다.
최근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가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운동에 주력해온 것은 이런 병폐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대법원 판결은 이 운동과 그대로 겹친다. 6월 30일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노조법 제3조의 개정안은 다음과 같은 제2항을 신설하고자 한다. “법원은 단체교섭, 쟁의행위, 그 밖의 노동조합의 활동으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경우 각 손해의 배상의무자별로 귀책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 범위를 정하여야 한다.” 손배 책임의 개별화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대법원 판결은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의 절실함을 적지 않게 담아낸다. 노동조합법이 기업을 위한 법이 아니라 노동자를 위한 법임을 재확인한 것이다.
대법원은 추후 이 판결은 노조법 개정안과 무관하다는 해명자료를 내놓았다.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이 판결을 두고 노조법 개정을 위한 디딤돌 판결이라 환영하자 정치권의 눈치를 보며 부랴부랴 꼬리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판결이 선언한 ‘노동3권의 보장과 손해의 공평, 타당한 분담이라는 민법의 기본원칙’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식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국회의 입법의무는 더욱 가중된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법으로써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것이 법치주의라고 한다면, 그동안 법원이 무분별하게 기업의 편에 서서 노동자들을 손배로써 억압하던 관행을 일거에 청산하는 것은 그 법치주의의 핵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틈만 나면 법치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현 정부는 이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 겁박한다. 물론 법률안거부권은 대통령이 가진 헌법상의 권한이고 헌법규정상 대통령은 언제든지 이를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분립의 체제에다 대의제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의 헌법체제는 이 대통령의 거부권을 매우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 입법권을 최대한 존중할 의무가 대통령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노조법 개정안처럼 헌법과 손해배상제도의 이념에 충실하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대통령의 권한행사는 법규정이 아니라 대통령의 정치력에 의하여 실체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특히 법률안거부권은 정치의 대체물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보완재이며 정치의 촉진제가 되어야 한다. 야당이 일방적으로 법개정을 추진했다는 점은 거부권 행사의 변명거리가 아니라, 되레 대화와 협의에 입각한 정치의 장을 적극적으로 마련하지 않은 정부가 반성하고 사죄할 사항이다. 더구나 대법원조차 헌법과 민법의 기본원칙을 거론하며 이 노조법 개정안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놓았다.
법치를 내세우며 ‘헌법에 충성한다’는 대통령의 정부라면 이런 헌법정신을 거역하며 거부권을 행사하는 표리부동의 자기모순에 빠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통령이라면 권력분립의 정신에 따라 대법원의 판결에 승복하고, 대의제의 틀에 따라 국회의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국민주권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3.7.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