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다시 우리의 얼굴을 촛불로 밝히고
하나의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노사이드의 교과서적 사례’라고 불리는 또다른 전쟁을 목격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 고통에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함께 인류가 지향해온 평화와 공존이라는 가치가 가차 없이 무너지는 모습에 놀란 마음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제관계 속에서 해법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 들려오는 전쟁 관련 보도들은 해법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참혹한 심정만을 더한다. 가령 가자지구 민간인 사망자 수가 1만명을 넘었으며 어린이 사망자가 4천명에 이른다는 소식은 정상적인 국제질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게다가 어디선가는 이 전쟁을 통해 특별한 수혜를 누리고 있다. 우끄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목격하며 세계 각국은 경쟁적으로 군비지출을 늘렸고 그 과정에서 미국이 무기를 대량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외신 보도는 충격을 넘어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G7에서 가자지구의 교전중지를 지지한다는 보도가 함께 나오고 있기에 더욱 허탈하다.
국내의 분위기도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거의 매일 ‘괴랄’한 얼굴들을 목격하게 된다.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고,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책임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정치인들의 얼굴이 그렇다. 민생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노동권과 직결된 노란봉투법은 10년 가까이 법제화하지 못하면서, 총선용 이벤트라는 말도 무색할 만큼 무엇을 하자는 건지 알 수 없는 ‘김포시 서울 편입 제안’ 같은 뜬금없는 정책을 거론하는 모습을 보라. 괴상하고 별나면서 악랄하다는 뜻이 딱 맞아떨어지는 얼굴들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도 또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는 다른 문제다. 그것이 한 개인의 부도덕함을 넘어 공적 세계에 대한 신뢰감 자체를 훼손하기 때문에 그렇다. 훼손된 신뢰감은 냉소주의를 부르고 경제적 손실로도 직결되며 또한 정치의 작동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위기상황이었던 팬데믹 시기, 공적 세계에 대한 신뢰감이 시민적 주체성을 이끄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역량을 담아낼 무형의 공기(公器)라고도 말할 만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것을 깨뜨리고 있는가. 여러갈래의 힘이 이 훼손에 가담하고 있겠지만, 그중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박완서 산문 「두부」에는 1998년에 대통령취임식에 참석한 전직 대통령들을 관찰하고 이른바 인물평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중 한 인물을 그리면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어떤 경우에도 반성이나 뉘우칠 필요가 없는 자리는 실상 대통령 자리가 아니라 바로 오야붕 자리가 아닐까.”(박완서 『두부』, 창작과비평사 2002, 28면) ‘오야붕’이 누구인지 따로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리를 지탱하는 힘의 성격이 조금 바뀌었을 뿐 저 자리가 비단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새롭게 그 자리에 오른 이는 ‘반국가 세력’을 거론하며 분단체제를 재공고화하고 ‘이권 카르텔’이라는 용어를 매개로 유령집단을 만든 후 자신이 속한 진영의 모습을 투사하는 중이다.
전쟁의 폭력과 괴랄한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우리의 얼굴을 살펴보자. 「두부」에서 작가가 가장 가엾게 들여다보는 얼굴은 어느 평범한 청년의 것이다. 옥살이를 하고 나와 허름한 식당의 구석진 자리, 혈육으로 보이는 이들 곁에서 두부를 먹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는 이상하게 희망의 기미를 읽을 수 없었다며, 작가는 그 얼굴이 그 시대의 기본 표정이었다고 다소 냉담하게 적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얼굴이 저 청년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분노를 터뜨리면서도 어이없음에 당황해하는 얼굴들이 자주 보인다.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동시에 전환이 필요한 정동이기도 하다. 문제는 책임이다. 기득권 세력이 훼손한 것들을 스스로 감당하고 책임질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책임의 고통을 회피하는 순간 분노와 당황은 순간적인 반응에 그치고 만다. 한달 전쯤 미 의회에 진입해 가자지구의 평화를 촉구하는 시민운동이 있었다. ‘우리의 이름으로 학살하지 마라’( Not in Our Name)를 외친 운동의 주체는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유대인 대 팔레스타인이라는 전쟁의 구도를 시온주의자 대 팔레스타인의 구도로 전환시키고 시온주의자와 유대인이 일치하지 않음을 알렸다. 이 행동은 지배세력의 언어가 함몰시킨 진실을 드러내고 평화와 공존이라는 가치지향과 어긋난 세계의 참극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태도이다. 이름을 당당하게 거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공동의 이름은 책임의 고통을 긍정하고 여럿의 꿈을 감당하기 위한 발명품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촛불로 불러줄 만도 하다. 성난 표정이 드리워진 얼굴에 촛불의 꿈을 되비춰볼 필요가 있다. 그 안에는 이미 노란봉투법도 있고 사회적 참사에 대한 애도와 안전한 나라를 향한 희망도 있다. 촛불 속 더 많은 희망의 목록들을 다시 기억하자. 괴랄한 얼굴들을 우리 앞에서 사라지게 할 힘도 분명 거기 있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3년 겨울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송종원 / 문학평론가
2023.11.28.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