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세계 여성의 날, 페미니즘의 미래를 생각하다
여성주의/페미니즘이 질식하고 있다. 도처에 성불평등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공격의 대상이거나 회피의 대상이 될 뿐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지만 여성의 목소리나 성평등 의제는 들리지 않는다.
18세기 참정권 운동으로 시작된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의 물결은 수세기 동안 몇단계를 거쳐 진보적 변화를 추구하고 성취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1991년 수전 팔루디가 정의한 것처럼 ‘백래시’, 즉 여성의 정치적 이득에 대한 반격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힘들게 성취해낸 성과들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확산되었다. 우리의 경우 급기야 정치적 보수화와 퇴행으로 성평등 총괄 부처인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언할 정도로 혐오와 백래시가 극대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24년 대한민국 페미니즘의 미래를 묻고 새롭게 구상할 수 있을까? 여성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견고한 성별 임금격차와 일터에서의 불평등과 차별, 미비한 돌봄체계로 저출생 문제는 커져가고 있다. ‘2023년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의 지위는 전체 146개 국가 가운데 105위이고,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26년째 OECD 1위이다. 이에 더해 0.7명에서 0.6명으로 하락하고 있는 출생률은 인구소멸을 가속한다. 국제사회는 한국의 위상과 현저하게 다른 이같은 성불평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저명한 페미니스트 학자인 조앤 윌리엄스가 한국의 저출생 지표를 보고는 “어머나, 대한민국은 망했네요”라고 외친 것이 현실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최근 저출생 문제에 대한 사회적 각성과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온갖 기사와 TV 프로그램에서 연일 이에 대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그동안 출생률에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소위 전문가와 행정관료 등이 국제적인 비교를 통한 수치를 잔뜩 들고 나와 그 심각성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지켜보는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한숨만 나올 뿐이다. 저출생은 단순히 인구 문제가 아니고 성평등 문제이며, 그래서 오래전부터 해법과 대책을 제시해왔지만 최근의 정책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삭제되어 있다. 아이를 낳으면 돈을 주거나 빌려주겠다는 방향성 없는 임기응변식 정책으로 과연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문화적 백래시와 사회적 위기 속에서 다시 페미니즘을 생각해본다. 페미니즘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믿음과, 성차별과 성불평등을 유지하는 체제를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가치이다. 18세기 페미니즘 부상 이후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해왔고, 성차별에 대한 태도와 성불평등 현상도 크게 바뀌어왔다. 페미니즘은 일부 사람들이 ‘페미’라고 경멸하는 한가닥의 납작한 사상이 아니다. 그 요구와 목표에 따라 다양한 갈래가 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동해왔으며, 제1기, 제2기, 제3기를 지나 이제 네번째의 새로운 페미니즘 물결이 길을 헤쳐가고 있다. 그래서 여성과 남성이 주목할 만한 수준의 평등을 어느정도 달성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여성들은 페미니즘이 여성의 삶에서 드러나는 가시적·비가시적 차별과 장벽을 제거하려고 노력해오기는 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더 나아가야 할까?
다가오는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1908년 끔찍한 노동조건과 착취에 저항하여 15,000여명의 여성 노동자가 뉴욕 거리로 나와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투표권을 요구하는 항의시위를 벌인 것을 계기로 1911년 첫번째 세계 여성의 날 집회가 열렸다. 100여년 전, 그 첫번째 행진은 가혹한 노동조건 개선과 착취 종식, 평등권과 동일임금 쟁취를 위한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목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주의 위기와 빈부격차 심화, 분쟁과 전쟁의 확대로 인한 평화의 위기, 그리고 백래시와 혐오가 몰고 온 성평등 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페미니즘의 가치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그리는 계획을 세워야 할 때이다.
유엔의 2024년 세계 여성의 날 공식 주제는 ‘여성에게 투자하라: 진보를 가속화하자’(Invest in women: Accelerate progress)이다. 유엔 제68차 여성지위위원회의 주요 주제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기관 및 자금 조달을 성별 관점에서 강화함으로써 성평등 성취와 모든 여성과 소녀의 역량 강화’에 기초한 ‘진보 가속화’가 필요하다는 선언이다. 포용성의 확대를 목표로 하는 ‘Inspire Inclusion’ 캠페인도 펼친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더 나은 미래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3월 8일 청계광장에서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제39회 한국여성대회가 열린다. 캠페인 주제는 ‘성평등을 향해 전진하라. 어두울수록 빛나는 연대의 행진’이다. 페미니즘과 성평등 가치에 대한 공격과 퇴행이 극심한 상황이지만 성평등을 향한 도전은 멈출 수 없다는 선언이다. 성별 임금격차 해소, 성평등한 삶과 일터의 공존 그리고 돌봄권 보장 요구는 저출생 해결의 핵심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여전히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길을 찾고 있다. 페미니즘은 성평등을 통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가치로 활용되어야 한다. 돌봄에 대한 성별규범을 변화시키고 여성과 남성의 반목이 아니라 이해와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페미니즘 없이 미래를 그릴 수 없다.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논의하고 공유하는 성평등 기획과 실천을,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인 페미니즘의 미래를 기대해본다.
강이수 / 상지대 명예교수, 전 한국여성학회장
2024.3.5.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