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문화자본이 계급재생산에 작동하는 방식: 샘 프리드먼·대니얼 로리슨 『계급천장』
「러브 액츄얼리」 등 영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 휴 그랜트,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도 출연한 틸다 스윈튼, 드라마 「셜록」의 주인공 베네딕트 컴버배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영국배우라는 것. 또 하나 있다. 명문 사립학교에 명문 대학을 졸업한 상류층 출신이라는 것이다. 유명한 영국배우 중 상당수가 비슷하다. 물론 이들은 뛰어난 배우다. 표준 영어로 간주되는 용인발음(RP, Received Pronunciation)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실험적 연극이나 독립영화 출연 등을 통해 쌓은 탄탄한 연기력을 자랑한다. 바로 그 능력의 구축에 계급적 배경이 작동한다. 용인발음은 가족환경과 사립학교 교육을 통해 체화된다. 무명 시절에도 수입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다양한 서사를 경험하고 폭넓은 캐릭터를 구축한다. 이들이 뛰어난 배우로 성장해가는 동안 비슷한 역량으로 평가받던 중하층 출신 연기자들은 경력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서 정체하거나 뒤처진다.
사회학자 샘 프리드먼(Sam Friedman)과 대니얼 로리슨(Daniel Laurison)이 함께 쓴 책 『계급천장: 커리어와 인생에 드리운 긴 그림자』(The Class Ceiling: Why it Pays to be Privileged, 홍지영 옮김, 사계절 2024)는 현대 영국사회의 계급 불평등을 ‘계급천장’이라는 용어로 포착한다. 주장은 간명하다. 경영자, 전문직 등 특권층 가족 배경을 가진 사람이 엘리뜨 직종에서 성공하기 유리한 반면, 중간계급, 노동계급 출신은 불리하다는 것이다. 유불리가 어느 정도일까? 사례 하나만 보자. 이튼, 해로우, 럭비 등 아홉개 명문 사립학교 졸업생이 저명한 영국 엘리뜨 명부인 『후즈 후』(Who’s Who)에 등재될 확률은 다른 학교 출신보다 94배 높다.
영국식 학벌주의에 대한 비판서일까? 그보다 더 논쟁적이다. 중간계급, 노동계급 출신 중에도 명문학교 졸업자는 있다. 거기에 직무능력도 뛰어나면 상승의 사다리를 오르게 된다. ‘개천에서 난 용’들이다. 이들이 어느 순간 상승을 멈춘다. 비슷한 능력과 경력의 특권층 출신 동료는 계속 올라간다. 특권층 출신의 상승을 돕고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출신의 상승을 가로막는 이 장벽을 저자들은 ‘계급천장’이라고 부른다.
계급천장은 어떻게 작동할까? 부모의 지원(엄마 아빠 은행), 특권층 출신 상사의 동종선호에 따른 후원(도움의 손길) 같은 요인들은 예상 가능하다. 프랑스 사회학자 삐에르 부르디외의 분류법에 따른다면 전자는 경제자본의 힘이고 후자는 사회자본의 힘이다. 저자들은 더 나아간다. 태도, 취향, 교양, 발음과 같은 문화적 특징들이 계급천장의 핵심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능력에 따른 사회이동이 활발해진 결과, 영국이 계급 없는 사회가 됐다는 ‘계급 종말 담론’의 허구성을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개념을 통해 폭로하는 책이다. 엘리뜨 직군에서 ‘사회적 봉쇄’가 작동하고 있음이 여러 통계로 입증된다. 예컨대 상위 중간계급 출신은 노동계급 출신에 비해 엘리뜨 직종에 종사할 확률이 6.5배 높다. 오늘날 영국사회에서 계급태생은 여전히 계급도착지와 긴밀하게 연계된다. 수 세대에 걸친 정치인들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위대한 평등기제’(great equalizer)가 아니다.
저자들의 분석이 특히 빛나는 지점은 엘리뜨 직종 종사자 175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면접을 통해 계급천장이 실제 직업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면접 대상자들은 주요 TV 컨텐츠 제작사 중 하나인 6TV, 대형 다국적 회계법인 터너 클라크, 건축회사 쿠퍼스, 그리고 별도로 표집된 연기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기업명은 모두 가명). 계급천장은 6TV와 터너 클라크, 연기자 집단에서 뚜렷하게 작동한다. 특권층 출신이 동등한 자격의 중간계급, 노동계급 출신보다 쉽게 성공한다. 6TV는 방송 제작사라는 특성상 자유롭고 격식 없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 인터뷰를 통해 이런 분위기가 사실은 고도로 ‘학습된 비격식성’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옷차림, 유머, 말투, 교양,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포함해서 ‘아는 사람만 아는’ 세련됨의 코드가 있다. ‘체화된 문화자본’이다. 방송제작사에서 고위직에 필요한 핵심 역량에 대한 객관적인 합의는 거의 없다. 한 임원은 이렇게 말한다.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확실히 더 쉽습니다. 서로 이해하니까요.” 역시 핵심 역량의 정의가 불분명한 회계 컨설팅 회사도 비슷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코드가 있다. 특권층 출신들은 말한다. “예외 없이 더 상류층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더 편하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중간계급, 노동계급 배경을 가진 이들은 기대치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열등감을 느낀다. 반면 기술적 측면이 중요하고 역량이 비교적 객관화되는 건축설계 회사에서 계급천장은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장에 익숙한 노동계급처럼 보이려는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반면 이 회사는 유리천장이 뚜렷하다. 파트너 중 여성은 한명도 없다.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주장은 중간계급, 노동계급 출신으로 상승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 ‘자기제거’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경력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파트너까지 오른 사람이 최고위직에 오르기 직전에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도대체 왜? 엘리뜨 직장의 특권층 출신 사이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열등감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이 클럽의 진정한 회원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출신계급과 특권층 사이에 끼어 ‘문화적 노숙자’가 된 느낌을 받는다. 능력주의에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개천의 용’들마저 고통스럽다. 사회이동으로 계급 불평등 문제를 대체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 모두는 지구 반대편 영국 이야기다. 한국사회에서 문화자본 이론의 적실성은 논란거리라고 하기 힘들다. 경험 연구가 적은 탓이다. 한국의 특권층은 문화적으로 천박해서 문화자본론을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도 종종 접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인맥 등 사회자본의 힘이 계급 재생산에 훨씬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뜨층의 세대 재생산이 반복되면서 한국에서도 예술에 대한 교육투자가 (성별화된 방식으로) 크게 늘어났고, 이것이 ‘결혼시장’을 매개로 계급적 구별짓기의 중요한 작동방식이 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문화자본의 힘이 커지는 경향이라는 ‘가설’을 세워봄직하다. 미국 사회학자 로런 리베라의 『그들만의 채용 리그』(이희령 옮김, 지식의날개 2020)에 따르면 미국 최상층 기업도 채용 과정에서 집안 배경, 문화적 적합성 등을 중요하게 따진다. 다만 사회자본이나 지원자의 행동 등도 고려되고 문화자본만이 두드러지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연구가 진전되어 막연한 감만으로 이야기하는 단계를 넘어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조형근 / 사회학자
2024.7.30.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