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시간과 공간이 만든 비가시성에 맞서는 글쓰기: 롭 닉슨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한량없이 느리게 일상적으로 계속되며 피해가 나중에 드러나는 ‘느린 폭력’이 있다. 유해화학물질이나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과 공기와 토양을 통해 서서히 병드는, 개발 혹은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대를 이어 살아온 땅과 공동체를 빼앗긴 후 난민이 되어 떠돌거나 반대로 보호구역에 격리되는, 종전 후에도 삶터에 남겨진 불발탄과 지뢰와 방사성물질에 의해 두고두고 살해당하는, 이 느린 폭력의 피해는 가난한 사람들이 불균형할 정도로 많이 겪는다. 그리고 인간 사회는 느린 폭력에 대하여 고질적인 시야결손 상태에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요즘 들어 기후위기를 염려하거나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보려는 모습이 예사로워지는 등 환경문제가 일상적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화석연료 생산이나 소비로 이득을 누리는 편과 그로 인한 피해를 뒤집어쓰는 편이 지구 이쪽저쪽으로 나뉘어 있음을 예리하게 가려 말하는 목소리는 흔치 않다.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지를 받아 들지 말지 의사를 묻거나 비용을 지불할 준비를 시키는 정책은 가깝지만, 그 포장지 원료로서 원유나 셰일가스를 퍼올리며 나오는 부산물을 팔아 돈을 버는 석유화학기업들을 향해 플라스틱 오염의 책임을 묻자는 방식은 멀다. 미국 환경주의에는 환경정의에 대한 관심이 더 필요하며 “느린 폭력을 성급하게 ‘세계적 흐름’이라는 완곡어법으로 얼버무리지 않”도록 탈식민주의와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롭 닉슨(Rob Nixon)의 주장은 한국에서도 귀 기울일 법하다.
느린 폭력에 대한 시야결손에는 과학기술계의 역할도 한몫한다. 가령 생분해 플라스틱을 개발한 과학자들에게 플라스틱 공해의 책임을 석유기업들에 연결시키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악의야 없었겠으나, 생분해되는 ‘좋은’ 플라스틱이라는 말 다음에 반드시 해야 할 다른 설명이 붙지 않음에 대하여 정말 아무 책임이 없는지 의문은 가져볼 일이다. 생분해되는 데 수십년이 걸리며 그조차 따뜻한 환경이어야 하므로 바다에 투기되면 결국은 일반 플라스틱 쓰레기처럼 영원히 썩지 않고 남아서 물새의 뱃속을 가득 채우고 상어의 지느러미에 얽히고 거북의 콧구멍에 박힐 것이라는 사실, 친환경이건 그린이건 에코건 재활용 가능이건 그 무슨 인증을 받더라도 플라스틱은 플라스틱이며 그 폐기물을 쏟아내는 속도를 획기적으로 줄여야 그나마 파탄에 이르는 시간을 늦출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노동 및 환경 보건 영역의 큰 이슈들에서는 이처럼 무언가를 덜 말하는 방식부터 새빨간 거짓말을 꾸며내는 것까지 기업의 이익에 복무해온 과학자들을 어김없이 발견할 수 있다.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Slow Violence and the Environmentalism of the Poor, 2011,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0)의 저자 롭 닉슨이 요약했듯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더 큰 내러티브가 사실이라고 확인해주는 내러티브를 생산해 전파하는 것” 혹은 “무행위로부터 가장 큰 이득을 누리는 세력”을 위하여 “무행위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대중추수적 불확실성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다.
저자는 느린 폭력의 가해자들과 느린 폭력의 확산을 한층 악화시키는 저 ‘의혹 생산자들’에 맞서는 힘을 글쓰는 이들에게서 찾고 있다. “모호한 정치적 수사와 언어적 위장이 치르게 될 세속적 대가”에 민감한 지식인, 제도권 밖에 머물러 “직업적 항복의 경제학에 연루되어 비타협적 연구 지속 능력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제너럴리스트, “훈련되어 있으되 결코 규율적이거나 꾸준한 학자형이 아닌 자유롭게 부유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작가-활동가’들 말이다. 책의 끝 부분에 가면 아예 대놓고 작가-활동가를 청자로 호출하여 “속도라는 디지털의 신”과 “불균형할 정도로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뉴미디어의 시대에 “불균형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느린 폭력의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거기에 정서적 힘을 부여”하자고 호소한다.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희망으로서의 자원”이 되어줄 수 있다며 어깨를 두드려주기까지 한다.
느린 폭력은 인간이 쉽게 인식하기 어렵다. 미디어에서 다룰 만한 스펙터클도 부족하다. 느린 폭력의 피해자인 “가난한 사람들과 사면초가의 공동체들”은 그 비가시성을 넘어서느라 고군분투해야 한다. 간신히 가시성을 획득한 다음에는 제도가 인정하는 피해자의 범주에 맞추어 자신을 정의하고 그 정의가 규정하는 내러티브에 맞추어 자기 삶을 요약해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름이 피해자 명단에 들어가 마땅하며 자신의 어떤 상태가 보상 대상으로 인정되어야 마땅함을 증명해내야 한다. 느린 폭력은 삶의 총체를 여러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파괴하지만 제도는 무너져내린 모든 것을 피해로 집계하지는 않으므로, ‘중요치 않은’ 이야기를 공연히 꺼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다. 꺼내어봤자 어차피 편집되겠지만. 그나마 느린 폭력의 피해자들을 다루는 콘텐츠에서 가장 흔한 형식은 아마도 삼인칭 논픽션일 것인데 이 형식으로는 피해와 고통을 가장 심부까지 해부해 보이기가 아무래도 어렵다. 정신의 고상함까지 고통에 집어삼켜진 사람이나, 그렇게 잃을 만한 고상함을 아예 가져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한 처지였기에 느린 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호명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 사람을 다루는 경우라도 독자나 시청자가 공감하기 어려운 곳까지 굳이 조명하지는 않는 편이다. 가령 이 책에서 소개한 인드라 신하의 픽션 『애니멀스 피플』(Animal’s People, Simon&Schuster 2009)에서 모종의 화학물질로 인해 “선례도 없고 후손을 남길 가망도 없는 네발동물”로서 “비정상적으로 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주인공 ‘애니멀’처럼 “고삐 풀린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음모를 꾀하고” “기생적 생활 태도와 잔꾀를 무기삼아 살아가는” 피해자의 모습이 삼인칭 논픽션에 담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하여 피해는 스테레오타입에 국한하여 규정되고, 실제 현장에서 거의 항상 마주치는 느린 폭력의 어떤 측면은 콘텐츠가 미처 포괄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의 틈새로 빠져나가 숨어버린다.
느린 폭력을 폭로하거나 반대하는 이들의 모습도 해묵은 틀에 박제하듯 그리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 편에 서서 기록하고 증언하거나 연구하고 논쟁하고 변호하는 지식인-전문가들에게는 흔히 손해를 무릅쓰고 진실을 수호하는 시대의 양심, 탄압에 굴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영웅의 얼굴로 천편일률적인 메이크업이 두껍게 칠해지곤 한다. 뉴스, 인터뷰, 르뽀, 보고서, 에세이 등 다양한 형식을 막론하고 삼인칭 논픽션이 대부분 그러하다. 저 형식의 콘텐츠를 만드는 목적이나 주어진 시간 및 자원의 제한이 이런 특성을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책에서는 작가-활동가들이 어떤 식으로 그런 관습과 마주했는지 몇개 사례들을 보여준다. “나서지 않는 자세와 영웅적 자기표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왕가리 마타이의 운동 회고록, 유명 인사로서 자신의 가시성을 이용해 “냉담한 기술의 언어가 가장 취약한 존재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드러내”고자 했던 아룬다티 로이의 에세이, 송유관 반대투쟁으로 군사정권에 사형당하여 순교자처럼 일컬어지던 자기 아버지의 대의는 지키되 “가정에 부과된 정서적 희생에는 반란”을 함으로써 “대의의 무게에 짓눌린 스스로를 해방”시킨 사로위와 2세의 논픽션들, 자신과 느린 폭력의 피해자들 사이의 인종적 동질성과 계급적 이질성이 주는 혼란스러움을 성찰한 은데벨레의 글 등이 있다. 피해자와 동일시하기엔 멀고 객관성을 인정받기엔 너무 가까운, 서민성을 주장하기엔 너무 잘나가고 전문성을 인정받기엔 너무 비제도권인, 이름이 나야 운동을 널리 알릴 수 있지만 유명해지려 운동을 이용한다는 손가락질을 피할 도리가 없는, 이 난처하기 이를 데 없는 작가-활동가들의 처지에 (저자의 평가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편들어주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저자는 이 책을 관통하는 세개의 열쇳말(느린 폭력, 빈자의 환경주의, 작가-활동가)을 담아 각 장마다 인도 보팔 유니언 카바이드 공장의 독성 화학물질과 체르노빌 핵발전소 방사성물질 누출로 병들고 죽어간 이들, 석유라는 “자원의 저주”에 걸려 극단적 빈부격차와 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해온 사우디아라비아와 나이지리아의 역사, 메가 댐 건설 때문에 공동체가 해체당하고 심지어 살해되기까지 한 과테말라와 인도의 개발 난민들, 식민지배 후에도 원주민 보호구역에 고립되거나 사냥감 보호구역 또는 국립공원을 위하여 추방된 아프리카 원주민들, 감손우라늄과 집속탄과 지뢰 등으로 종전 후에도 오랜 기간 살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등장시킨다. 일년짜리 국제환경정의 강의나 세미나 프로그램으로 손색없을 목록이다. 아울러 한국이나 아시아판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에 넣을 목록은 어떠할 것인지도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로 남는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공유정옥 / 직업환경의학과 의사
2024.7.30.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