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개발독재시대의 생명평화운동과 장일순의 삶: 한상봉 『장일순 평전』
최근 세계의 중요한 변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매우 비관적이다. 한국사회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합계출산율과 최고의 자살률로 표상되는 ‘압축소멸’(조효제)의 시대를 맞았고, 세계는 인류 실존의 위기나 다름없는 ‘기후위기의 시대’와 ‘전쟁의 시대’(박노자)를 관통하고 있다. 사람들은 지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해가고 있다.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1928~94) 30주기를 맞아 발간된 『장일순 평전: 걸어다니는 동학, 장일순의 삶과 사상』(삼인 2024)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남아 있다며 다정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장일순은 시대의 약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혹은 최악의 적들과도 소통하기 위해 오히려 내 앞에 그들을 기꺼이 앞세우고 자신을 최대한 조아려 “바닥을 기어서 천리를 가야 한다”고 말한다. 모두가 전력을 다해 앞으로 달리라고 외치던 개발독재시대에 바닥으로 기어가라니? 그런데 놀랍게도 장일순과 교류한 당대의 수많은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천천히 기어가기를 선택했다. 1970, 80년대 소위 원주그룹으로 불린 다수의 지역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리영희 교수와 김지하 시인 등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장일순의 토막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그의 말을 신중히 경청하고 주저 없이 실천으로 옮겼다. 「아침 이슬」의 김민기는 장일순을 “아버지 같은 분”이라 말하며 ‘원주그룹’을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하기도 했다. 대학로 소극장 ‘학전’의 김민기가 자임했던 ‘뒷것’(「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SBS 다큐멘터리 2024)은 원주그룹 내의 장일순의 역할과 매우 닮아 있었다.
장일순은 이미 이십대의 젊은 시절부터 원주를 대표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명망이 높았다. 1946년 국대안 반대운동으로 인한 서울대학교 제적, 한국전쟁 이후 원주 정착과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사업 전개, 진보당사건과 4·19혁명의 정치파동 속에서 혁신계 후보로서 감행한 두번의 총선 출마와 낙선, 그리고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으로 인한 3년의 옥고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십대는 극우반공체제에 대한 저항과 좌절로 점철되어 있었다.
출소 이후 보호관찰 대상자로서 모든 사회적 활동을 차단당했던 장일순의 일상은 1965년 지학순 주교의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부임과 함께 주요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당시 지학순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평신도 중심의 교회 설립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학순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장일순과의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과 신뢰 형성 이후, 장일순을 따르던 김지하와 박재일 등도 세례를 받고 원주교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소위 ‘원주그룹’의 초기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72년 남한강 유역 대홍수 피해에 대응하기 위한 원주교구의 ‘재해대책사업위원회’ 설립은 원주그룹에 의한 지역사회활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했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는 부락개발운동과 신협운동을 3개 도, 13개 시, 90여개 농촌 부락과 10여개 탄광 지부에서 진행했다. 그런데 이들의 농촌과 광산사업은 군사정권의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마치 정부 주도하의 전투처럼 진행되었다. 과잉생산된 시멘트가 정부에 의해 매입되어 부락들에 무상으로 제공되었고, 이를 활용한 마을길 포장과 초가지붕 개조가 ‘새마을운동 지도자’의 지휘하에 위로부터 강행되었다. 반면에 재해대책사업 실무 요원들은 자신을 ‘상담원’이라 호칭하며 오히려 ‘지도자’ 되기를 스스로 경계했다. 상담원의 임무는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사업이 무엇인지 구상하여 다시 최적의 방안을 그들에게 제안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아래로부터의 긴밀한 상담활동을 통해 주민들에게 적합한 한우작목반, 약초작목반, 신용협동조합 등의 설립을 추진했다. 광산지역 책임상담원이었던 이경국은 가장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 있던 광부들의 기본권 유린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김금수, 천영세, 박현채 등을 불러 광부들을 직접 교육시키기도 했다. 이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노력은 결국 20만명 태백 탄전 광부들을 설득하여 15군데의 신용협동조합과 50군데의 소비조합을 창출해낼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장일순은 운동의 방향을 생명운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국가는 농업에서도 더 많은 생산량의 확보를 위해 비료와 농약을 과도하게 살포하며 생태계를 교란하고 토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장일순은 “땅이 죽어가고 생산을 하는 농사꾼들이 농약 중독에 의해 쓰러져”가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보면서, “인간만의 공생이 아니라 자연과도 공생하는 시대”적 목소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원주그룹의 반개발 생명평화운동 또한 자기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아래로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이후 장일순은 생명운동에 기반한 도농농산물직거래운동인 원주소비조합과 한살림농산의 창립을 추동하였고, 1989년 한살림모임 창립총회를 통해 「한살림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흥미롭게도 「한살림선언」은 “가치관에 있어서는 한민족의 오랜 전통과 맥을 이어오고 있는 동학의 생명사상에서 그 사회적, 윤리적, 생태적 기초를 발견”했다고 천명하고 있다. 『장일순 평전』의 부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장일순은 ‘걸어 다니는 동학’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을 숭모하고 있었다. 장일순은 직접 해월의 집터를 발견하여 추모비를 세웠고, 그 추모비에 손수 해월이 설파한 삼경(三敬: 敬天, 敬人, 敬物)의 의미를 새겨넣기도 했다. 장일순은 지난 백년 동안 한국사회가 모든 사람의 에너지를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인간 생존의 터전을 와해시켰다고 인식했고, 동시에 이 심대한 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백년 전 동학사상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달리 말해 장일순은 이미 백여년 전에 동아시아적 세계관의 비판적 계승과 서학에 대한 주체적 대응을 모색했던 소위 ‘개벽파’의 사상을 통해 현대 한국사회와 인류의 실존적 위기를 돌파해나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치 앞도 전망하기 힘들었던 암울한 군사독재 시대에도 백여년의 통시적 전망을 품은 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고 일깨웠던 장일순의 사상과 실천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김태우 / 한국외국어대 한국학과 교수
2024.7.30.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