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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존: 초국가적 한민족의 미래

정병호

남북교류가 한창이던 2005년 평양에서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여기저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고 리영희 선생이 내게 나직하게 한마디 하셨다. “난 어째 악어의 눈물 같아. 남이나 북이나 서로 상대방을 잡아먹는 ‘통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잖아?”


분단된 지 60년, 이산가족인 선생으로서는 생이별의 고통 속에서 산 세월이었다. 헤어진 가족들과 편지 한장 주고받지 못하고, 생사조차 모르는 이런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로잡는 일, 이전에 함께 살던 그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바로 ‘통일’이었다. 그런데 그 간절한 ‘소망’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지 선생은 꿰뚫어보셨다. 서로 잡아먹으려 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족국가주의 이념 때문에 상대방을 제대로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만이 ‘정통’이고 ‘정상’이라고 여기는 강고한 자기중심성이 일반적인 국제관계만도 못한, 아니 전쟁 중의 적국만도 못한 비인도적인 분단체제를 지속시켰다.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극한 대치는 분단 80년을 바라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리영희 선생을 비롯한 분단 1세대는 이산의 ‘한’을 풀지 못한 채 대부분 돌아가시고, 이제는 남과 북이 하나였다는 사실조차 생소한 분단 3세대, 4세대가 성인이 되었다. 돌아가시기 전, 선생은 ‘통일’보다 ‘수렴’이 더 바람직하다고 하셨다.


분단 이전에 동질적인 사회였던 남과 북은 ‘한국(대한민국)’과 ‘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개의 국가를 세우고 전쟁과 기나긴 냉전대립 속에 각각 다른 방식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상이한 성격의 ‘국민’을 만들어냈다. 각기 다른 방식의 강력한 국민교육과 구조적으로 판이한 사회경제체제 속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 규범, 생활방식을 내면화한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자라난 것이다. 문화는 생각보다 빨리 변한다. 실제로 분단 당시의 문화와 지금 우리의 삶의 방식을 비교해보면 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통일’만 되면 분단이 만든 문화적 이질성은 쉽게 지워지리라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민족으로서의 문화적 동질성을 재확인하고 회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의 동질성은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너무 달라진 남쪽의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북쪽의 그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통일’은 함께 살았던 과거를 회복하는 ‘사건’이 아니다. 달라진 두 문화가 함께 사는 방법을 만들어나가는 창조의 ‘과정’이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작업이다.


문화배경이 다른 한민족 구성원이 함께 사는 법을 익히려면 한민족 이산의 역사와 초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한민족은 한국과 조선 두 나라만이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역사에 개입한 4대 강국에서 살고 있는 ‘초국가적 민족’이다. 탈냉전 시대를 맞아 1990년대 이후, 그들 중 상당수가 다양한 경계를 넘어 교류와 재이주를 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한국사회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약 반수는 한민족 출신 이주민들이고, 외국인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사할린 귀환동포와 중국 조선족으로 귀화한 사람, 재외동포 출신으로 국적을 회복한 사람, 입국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이 된 북한이탈주민까지 합하면 그 비율은 더 높다.


한민족 이주민들은 다양한 국민국가의 소수자, 주변인으로서 국가의 통제와 관리를 넘어서 전략적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살고 있다. 따라서 국민, 민족, 문화를 동일시하고 그것의 일치를 이상화해온 단일민족국가의 동질적 ‘문화’에 대한 고정관념과 국민국가 단위의 편협한 ‘국사’ 개념은 극복해야 한다. 특히 ‘민족’과 ‘국민’을 같은 개념으로 보면 혼란이 생기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의 민족은 꼭 하나의 나라에 살아야 된다거나 하나의 민족은 반드시 공통된 특징을 가져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대표적으로 다른 나라 국적의 한민족 동포가 있다. 이들은 출입국심사 때부터 ‘KOREAN’ 창구에 서지 못하면서 이런 현실과 마주치게 된다.


혈연 공동운명체로서의 민족 개념은 탈냉전 시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조선족을 만나면서 흔들렸다. 핏줄보다 이른바 ‘국적’이 중요해진 것이다. 남한사회는 가까운 친척이자 같은 말을 쓰는 조선족을 ‘중국사람’이라고 차별했다. 중국에서는 그저 조선사람(한인)이라고 생각하고 살다가 남한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실감하게 되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에서 태어나 국적을 지키며 살고 있는 재일동포를 ‘우리말’이 서투르다고 ‘반쪽’ 취급을 하기도 했다. 이때는 남한식 ‘한국어’를 온전한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중요한 자격 요건으로 여겼다. 한국에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돌아간 젊은 재일동포 3, 4세 중에는 일본인으로 귀화하고 국수주의적 ‘일본유신회’에 가입한 사람들도 있다.


한편 북한주민과 탈북민들은 이념 대립의 관성적 사고로 ‘주적’ 또는 ‘위험한 사람’으로 경계된다. 탈북민 중에는 남한사람들의 사회적 차별이 무서워 스스로 중국 조선족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가난한 북한보다는 중국 출신이 덜 업신여김 당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도 한국사회의 주류집단인 ‘우리’가 아니라, ‘그들’로서 타자화된 ‘2등 시민’으로 사회문화적 차별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이 느끼는 주관적 차별 체감도는 다른 민족 출신 이주민 집단보다 강하다. 그만큼 상처가 깊은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다시 북으로 돌아가 같은 민족인 ‘한국’에서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고 차별당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조국 ‘조선’이 더욱 부강해져야 업신여김 당하지 않는다고 간증하기도 했다.


한민족의 범주와 정체성은 더이상 신성한 혈통이나 반만년 문화전통 같은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남한 주류집단의 민족 개념은 시대상황과 대상에 따라 급속하게 변했다. 경제 수준과 문화 차이에 따라 이기적인 기준을 들이대어 ‘우리’와 ‘남’을 가르고, 정통과 아류를 구별하며, 중심과 주변을 서열화했다.


이제 복합적 한민족 집단의 민족/국민 정체성을 문화상대주의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민족=국민’의 도식을 넘어선 민족과 국민 정체성의 다중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초국가적 민족 정체성’과 ‘초민족적 국민 정체성’ 개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민족 정통성을 경쟁하면서 스스로 중심을 표방하고 있는 남과 북, 두 국민국가의 단일민족국가 이념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가적 한민족 이주민과 난민, 망명자, 결혼이주자,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구조 해체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분단된 남과 북이 만남과 교류, 그리고 상호보완적인 공존관계를 유지하면서 더 나은 사회로 수렴되기 위해서도 긴요한 일이다.


분단시대에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교육받아 ‘한국어’가 능통하고, 주민등록증과 대한민국 여권이 있는 사람들만이 ‘100% 한국인’이자 ‘우리’라고 여겨서는 ‘민족통일’은커녕, 빠르게 ‘초민족적’으로 되어가는 대한민국의 ‘국민통합’조차 불가능하다. 탈북민 아버지를 둔 딸이 국경을 낮추는 일에 앞장서고, 필리핀 어머니를 둔 아들이 분단 장벽을 허무는 일에 나서는 성숙한 ‘초국가적 한민족’의 나라, ‘초민족적 한국민’의 나라가 되기를 꿈꾼다.


정병호 / 한양대 명예교수, 문화인류학

2024.10.22.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