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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주의 혹은 도둑정치, 누가 떼법에 매달리나

이대근 / 경향신문 정치·국제에디터


이명박정부의 수많은 장관 가운데 한명인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취임사를 굳이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의 취임사에는 되새겨볼 만한 대목이 하나 있다. "그리고 소통되기를 바랍니다. 대립을 부추기는 것들을 없애고 문화부 내에서만이라도 이념이 아닌 인간성에 근거한 문화로 소통되기를 바랍니다."


문화부장관다운 발언이자 실용주의를 섬기는 정부의 각료다운 취임사였다. 그러나 소통, 대립지양, 탈이념을 향한 그의 소망은 열이틀 만에 무너졌다. 정부 산하기관뿐 아니라, 학계·언론계·시민단체 등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김대중·노무현 추종세력과 좌파를 척결해야 한다는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느닷없는 '좌파사냥'에 뜻하지 않게 유장관이 너무도 신속하게, 그러나 어울리지 않게 맞장구를 쳤기 때문이다. 유장관은 "이전 정부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왜 그가 취임사의 다짐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스스로 무너뜨렸는지 제3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문화계를 필두로 한 '좌파사냥'


그러나 누가 잘못했는지는 지금 분명하게 판명되었다. 유장관은 지난 20일 "논란의 대상이 된 많은 분께 마음속으로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사과했다. 다음날에는 신재민 문화부 제2차관이 산하기관장들의 용퇴 여부는 기관장 본인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끝날 일을 두고,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왜 잘잘못과 진실을 가릴 수 없는 일인 듯 서로 흥분해서 자기 주장만 하며 다투었던 것일까.


집권세력의 이 이상한 문제제기의 배경에는 흔히 다음 세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첫째, 총선을 겨냥한 보수표 결집용 정치공세라는 것이다. 신집권세력은 매우 짧은 기간 정책이면 정책, 인사면 인사, 내부통합이면 내부통합에서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결과로 총선이란 중요한 정치행사를 앞둔 시점에 지지층은 빠른 속도로 이탈해갔다. 좌파와 우파간 대결 조성은 바로 이 이탈하는 보수층을 자극하고 결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둘째, 물러나지 않고 있는 정부 산하기관장들을 사퇴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공개압박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셋째, 이명박정부 국정운영의 난맥상을 노무현 세력의 발목잡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최근 인기하락의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사퇴압박 뒤에 도사린 정치논리


먼저 '보수표 결집'의 타당성을 살펴보자. 다수의 보수는 건강하고 합리적인 보수를 지향한다. 느닷없이 빨갱이 사냥식으로 이른바 좌파를 때린다고 엔돌핀이 솟는 보수는 아마 소수일 것이다. '좌파 때리기'로 보수표를 모으겠다는 발상은 그 자체가 다수의 합리적 보수를 모욕하는 일이다. 또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명박 대통령 지지자가 모두 보수성향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대통령을 선택한 사람 중에는 스스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집권세력의 이런 행태라는 사실이다. 결집한 것은 지지층이 아니라 반대세력이며, 난타당한 것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였다는 것이 증거이다.


둘째, 공개압박은 몇명의 기관장 사퇴로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다수가 사퇴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들은 본의 아니게 보수세력의 이념공세에 맞서는 좌파진영의 영웅이 되었다. 집권세력은 적대행위를 통해 상대는 키우고 자신은 죽이는 일을 한 것이다. 물론 산하기관장 가운데 능력과 무관하게 구집권세력의 권력을 배경으로 한자리하고 있는 인사들도 있다. 그들에 대해서는 유장관이 하던 방식대로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유장관은 자신이 서울문화재단 대표였을 때 신임 서울시장 체제가 출범하자 스스로 물러났다고 한다. 그런데 왜 유장관은 자기에게 적용했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셋째, 국정난맥의 원인은 집권세력에 있다. 노무현정부 때의 국정실패 책임은 한나라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정부에 있는 것과 같은 논리로, 이명박정부 혼선의 책임은 노무현정부가 아니라 이명박정부에 있다. 새 정부 출범 초기이기 때문에 책임 회피가 가능하다고 믿었다면 어리석은 판단이다. 오히려 초기의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런 혼선을 초래했기 때문에 책임이 더욱 무겁다.


실용주의는 간데없고 이념논쟁만 남아


집권세력의 갑작스런 좌파 척결 소동은 보다시피 성과가 거의 없었다. 자기 이익과 배치되는 결과뿐이다. 그리고 이 소동은 사회 각 분야, 특히 문화계 내의 격렬한 대결과 갈등을 부추김으로써 집권세력이 사회적 요구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의구심을 심어주었다. 새 정부 출범 한달도 안돼 문화예술인들이 서로 "낮술에 취해 폭력의 칼을 휘둘러대는 망나니" "권력에 기대어 자리보전하는 예술인"이라고 공격하며 험하게 충돌하도록 유도한 것은 새 정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화적 다양성과 공존을 존중해야 할 문화부가 사회·문화적 갈등 조성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타격은 더 크다. 그 많은 장관 가운데 유장관이 나선 것은 과거 이명박 연기로 박수받을 때처럼 이번에도 박수받을 기대를 하고 그랬던 것인지 모르지만, 배역도 잘못되었고 연기도 좋지 않았다. 이명박정부는 일하는 정부라더니, 일은 안하고 소란스러운 소리만 내는 정부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이 소동은 이명박정부 국정운영의 대원칙인 실용주의와도 배치된다. 실용주의라면 어떤 선험적 이데올로기나 경험을 통해 검증할 수 없는 절대진리라고 여기는 믿음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사실과 현실에 기초하고 과학적 합리성에 근거한다. 그러나 존재하지도 않는 이념대결을 부추김으로써 스스로 실용주의 가치를 훼손했다. 실용주의가 실제 국정운영에 스며들지 않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이 모두 그러지 않아도 떨어지고 있는 이명박정부에 대한 신뢰도를 더욱 추락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자살적 행위였다.


늦었지만 공세를 중단하고 사과한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그것이 법의 정신을 부정했다는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지층 결집에 별다른 정치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라면, 이명박정부는 이번 사태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


새 정부의 법치주의 파괴의 신호탄이 아니기를


한 나라의 국정은 법과 제도, 절차에 의해 운영하도록 되어 있다. 엄연히 법이 정한 절차가 있다. 국정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보장장치이다. 행정부인 내각은 이 법을 넘을 수 없다. 그것이 법치주의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며, 근대국가 성립 이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기본원리이다. 설사 이명박정부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해도 절차적 정당성 없이 권력이나 자리를 교체하려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그런데 이명박정부는 엄연히 법적으로 보장된 임기제를 무시했다. 법치주의를 흔든 것이다.


임기제를 무시하는 집권세력의 이런 실수가 노동자·농민의 '떼법'을 청산하겠다는 이대통령의 법인식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대통령은 국민 다수, 노동자·농민을 향해 떼법을 근절하겠다는 말은 수도 없이 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강자와 부자들의 불법을 어떻게 없애야 할지를 두고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대통령이 알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집권세력이 이곳 저곳에서 집중공세를 펴며 자리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것, 그것이 바로 떼법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약자의 그것이 그들의 이익을 대표하지 못하는 정치체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사회적 강자들의 떼법은 벌거벗은 이권 챙기기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압력으로 자리를 빼앗는 것, 그것은 민주주의(democracy)가 아니라 도둑정치(kleptocracy)이다.


2008.3.25 ⓒ 이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