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영화 〈체인질링〉을 보고 든 몇가지 생각
조광희 / 영화제작자
정치적인 문제와 윤리적인 문제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정치적인 의제는 어느 시점에서 윤리적인 의제로 전환되는가? 왜 우리는 '허구적인 작품'이나 '먼 곳'의 문제에는 적절한 윤리적 판단을 하면서 '지금 여기'의 윤리적 문제에는 눈을 감거나 혼란을 느끼는가?
1928년 LA, 전화국에서 근무하는 씽글맘의 아이가 사라진다. 여러달이 지난 어느날 경찰이 연락한다. 아이가 돌아왔다고. 그러나 그 아이는 그녀의 아이가 아니다. '체인질링'(changeling), 즉 뒤바뀐 아이일 뿐이다. 어떻게 자기 아이를 못 알아볼 수 있는가? 하지만 부패한 경찰은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서인지 아이도 못 알아본다고 윽박지른다. 사이비 전문가는 엄마를 자기 아이를 거부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간다. 급기야 엄마는 경찰에 대들다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다행히 엄마는 LA 경찰의 비리와 싸우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생각하는 목사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아이는 가짜임이 밝혀지고, 진짜 아이는 연쇄살인범에게 납치된 것으로 드러난다. 마침내 경찰과 부패한 관리가 댓가를 치르고, 연쇄살인범의 사형이 집행되면서 정의는 회복된다.
영화 <체인질링>에는 두 종류의 악이 있다. 연쇄살인범이 대표하는 '순수한 악'과 부패한 LA 경찰이 대표하는 '혼혈의 악'이 그것이다. 엄마가 주로 싸우는 대상은 '혼혈의 악'이다. 연쇄살인범은 이미 엎질러진 물, 사회의 어쩔 수 없는 얼룩이다. 그는 공동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자, 이미 악으로 분류된 자로서 지워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는 괴물이고 재난이다.
경찰은 다르다. 경찰은 시민이 고용하여 세금으로 먹여 살리는 자다. '시민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가정된 주체'인 그 경찰이 시민을 속이고, 때리고, 가둔다. 이것은 싸이코패스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순수한 악'이 아니지만 그래서 싸움은 더 힘들다. 엄마는 싸이코패스와는 달리 '경찰이 틀렸고, 자신이 옳다는 것'까지 증명해야 한다. 힘없는 씽글맘이 막강한 경험과 조직을 가지고 있고, 법률이 정당함을 보장하는 공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이 지경에 이르면 공권력이야말로 진정한 괴물이자 재난이다. 그 괴물은 공동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서식하고 있고, 나아가 공동체의 중핵을 점유하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연쇄살인범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확고하지만, 경찰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모호하다. 그래서 엄마가 진실을 밝히는 과정은 지난하다. 하지만 영화 바깥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연쇄살인범의 비윤리만큼이나 경찰의 비윤리를 직관적으로 안다. 영화를 보면서 어느 이라크 기자가 부시에게 했듯이 경찰에게 신발짝을 집어던지고 싶어하지 않은 관객이 누가 있었을까.
작고한 장인이 은퇴한 파출소장이라서 경찰에 우호적인 나 같은 사람 중에는 경찰에게도 딱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믿는 관객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보통 시민이라면 경찰을 옹호할 생각을 가질 수 없다. 만일 경찰이 아닌 엄마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 역의 앤절리너 졸리가 브래드 피트와 결혼한 것에 대해 억하심정이 있거나, 윤리적 판단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있음이 틀림없다. MB정부의 경찰이라면 그들의 인터넷 검색결과를 조사해서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관계가 있는지 파헤쳐야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영화관 바깥에서 자신의 공동체에 대해서 판단할 때다. 공교롭게도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도 연쇄살인범이 체포되었고, '공권력 집행의 정당성'이 문제되고 있다. 사람들은 연쇄살인범 강아무개에 대해서는 윤리적 판단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지만 공권력에 대해서는 다르다. LA 경찰의 비윤리성은 즉시 인지했던 사람들이 대한민국 공권력의 비윤리성에 대해서는 헷갈려 한다. 예를 들어 '미네르바 구속'과 '용산 철거민 참사'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권력에 대한 지지율은 3분의 1 내외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것을 여론이 매우 나쁘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내게는 그 숫자조차 경이롭다. 그 사람들은 아직까지 문제의 윤리적 성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나찌 전범재판을 참관하면서, 극도로 잘못된 공권력을 실행했던 사람들이 윤리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악의 평범함'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공권력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왜 분명한 윤리적 요소, 선악의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영화에서는 직관적으로 윤리적 문제를 인지하면서 막상 자신의 공동체에서는 윤리적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힘들이 현실에서는 그 의미가 은폐된 채 섬세하고 집요하게 작동하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 힘들의 비윤리성이나 거짓이 충분히 암시됨으로써 그 효과가 거세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권력에 우호적인 미디어의 공세' '공권력이 동원할 수 있는 다양한 자원' 그리고 '시민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가정된 주체가 보유한 상징적 위치'가 생산하는 효과들이 그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경쟁하는 정치적 세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윤리적 문제로 손쉽게 치환하는 것은 위험하다. 흔히 보수가 대표한다는 '전통'과 진보가 대표한다는 '변화' 중 어느 편이 더 윤리적이라거나 어느 편이 더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현실에서 활동하는 정치적 세력의 정체성, 지향, 실제의 행위에 대한 평가는 많은 경우에 윤리적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어떤 정치적 세력을 지지하느냐' 하는 문제가 더이상 윤리적 문제가 아닌 공동체에 사는 시민은 행복하다. 우리는 잠시나마 이미 그런 공동체의 구성원, 그런 공화국의 시민이 된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는가?
지난 대선이 정치적 노선의 문제임과 동시에 윤리적 문제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훨씬 소수였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집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정부를 지지하느냐의 문제가 대단히 윤리적인 질문임을 점차 실감하고 있다. 앞서 본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윤리적인 문제를, 자신이 한발짝 떨어져 보는 다른 사회, 다른 시대 그리고 작품 속에서의 윤리적인 문제보다 덜 인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부 예민한 사람들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서의 정치적 문제를 마침내 윤리적 문제로 인지할 수밖에 없는 발화점이 있다. 정치적 문제를 윤리적 문제로 인지하는 것을 방해하는 온갖 힘으로도 더이상 방어할 수 없게 되는 벼랑이 있는 것이다.
군사독재정부는 시민을 상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민주화 이후의 정부는 경찰밖에 움직일 수 없다(아니 혹시 모르겠다, 이젠 믿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그때 시민들에게는 휴대폰과 인터넷이 없었지만 지금 시민들에게는 있다.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일수록 부자유와 폭력과 부당한 대우를 참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민들의 인내심이 바닥나서 이 정부의 문제점이 정책의 문제를 넘어, 이념의 문제를 넘어 그리고 능력의 문제를 넘어 '근본적 윤리의 문제' '정의를 위한 투쟁'의 문제라고 받아들이게 될 때, 성난 시민들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호적인 신문들의 도움으로? 방송국들을 장악하는 전략으로? 법을 당신들에게만 유리하게 적용하는 방법으로? 그것은 당신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2009.2.11 ⓒ 조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