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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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인디음악의 역습

허지웅 / 프리미어 기자, 작가

잇몸에 피가 나게 이를 닦아도 당최 치석은 빠져 나올 줄을 모르고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모르거나 말거나 어쨌든 별 일 없이 산다고 노래하는 장기하가 6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최우수 록 노래 부문,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음악인 남자 부문, 올해의 노래상이다. 요즘 같아선 어딜 가나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나 '달이 차오른다, 가자'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최근 발매된 정규앨범 〈별일 없이 산다〉는 이 그룹에 별종 같은 아이디어 이외에도 놀라운 공력의 음악적 호흡이 전제돼 있다는 걸 증명했다. 막무가내로 쏟아졌던 세상의 관심을 감안해보면 그리 아무렇지 않게 툭, 내놓은 앨범의 출중한 완성도에 눈과 귀를 떼어놓기 어렵다.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이젠 영영 지난 기억인가 싶던 언니네이발관도 불현듯 내놓은 명반 〈가장 보통의 존재〉로 최우수 모던 록 노래/음반 부문, 그리고 최고상인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다. 음악적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살펴 심사하는 한국대중음악상은 올해 문화관광부의 기습적인 지원철회 통보로 적잖은 부침을 겪었다. 시상식은 날짜를 미뤄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열렸고 진행 미숙으로 몇가지 촌극 또한 연출됐다. 그럼에도 잔치는 풍성해 보였다. 인디진영 신예들의 대거진출 덕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공중파 TV 가요프로만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감탄사 후렴구가 무한반복되는 노래 외에 이토록 다양하고 듣기 좋은 음악들이 존재했었단 말인가, 싶어 놀랐을 법하다. 그만큼 주류음악과 인디음악은 대중의 인식에서 괴리되어 있었다. 인디진영 가수들이 한해를 정리하는 시상식에 대거 등장할 수 있던 데는 행사의 성격이 한몫을 했다. 앞서 언급했듯 한국대중음악상은, '음악상'으로서 당연한 자세임에도 동시에 희귀한 태도지만, 그러니까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가치와 음악적 완성도를 심사의 중요한 잣대로 다루기 때문이다. 이날 빅뱅의 태양도 2관왕을 차지했지만 어느 누구도 누군가의 들러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말은 한국에서 음악적 완성도를 따질 때 더이상 인디진영을 빼놓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주류음악계의 양념, 허리 혹은 다양성의 보루, 보완제, 조금 더 급진적인 자들에게는 대체제, 식으로 편하게 타자화되곤 했던 인디진영의 음악이 이제는 한국 대중음악의 오늘을 가늠하게 만드는 바로미터로서 그 위상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
 
현상을 설명하는 데 가장 유효한 배경이라면 역시 주류음악계의 황폐화를 들 수 있다. 새삼 입에 담기도 피곤한 일이지만, 음반시장규모는 십수년 전과 대비해 거의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줄어든 꼭 그만큼 거대기획사들의 세가 커졌다. 주류음악계는 거대기획사들의 아이디어상품으로 난장을 이루었다. 누구의 어떤 음악을 들어도 비슷한 멜로디에 구성에 진행에 비주얼을 담는다. 한국의 주류음악계는, 한국의 다른 주류 대중문화 산업과 마찬가지로 자본논리에 완벽히 흡수돼버리고 말았다.


작년 중반을 뜨겁게 달궜던 광장에서의 풍경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광장에는 대중문화가 없었다. 광장을 채운 한줌의 음악은 모두 지난 세대의, 혹은 일부에게만 소통되던 운동가요뿐이었다. 시민의 삶도, 대중문화도 모두 자본에 먹혔기 때문이다. 광장은 실용의 이름으로 자본을 신봉하는 정부에 맞서고 있었다. 일부 독립예술진영을 제외한 한국의 모든 대중문화산업 기반이 자본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 상황 아래서, 대중문화가 광장의 무기로서 소환되기란 애초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작년 들어 기획사가 배출한 아이돌 그룹 가운데서도 음악적으로 주목할 만한 존재들, 이를테면 빅뱅이나 샤이니 같은 그룹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아이돌 그룹도 진화한다는 사실을 방증하지만 이마저 기획사에 의해 길러지고 만들어진 '상품'이라는 한계를 부정할 수 없다. 주류 대중문화는 원래 돈의 논리를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도 돈이 모든 것에 우선하지는 않았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다. 재능있는 싱어 송 라이터나 감독, 작가가 불합리한 씨스템에 방해받지 않고 데뷔하거나 인기를 얻는 게 가능했다. 이제는 문이 좁아지다 못해 자물쇠가 걸렸다. 개인이 노력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이미 기반 자체가 잠식된 것이다.


과연 우리가 기억하는 80, 90년대 주류음악계의 싱어 송 라이터들이 지금 시점에 데뷔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은 데뷔할 수 없다. 시장도 없고 그 가치를 인정해줄 기획사도 없다. 이쯤 되면 인디진영에 전보다 다양한 신예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 배경이 자연스레 설명된다. 이제 와 온전한 자기 음악을 하고 싶은 싱어 송 라이터들에게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이다. EBS 〈스페이스 공감〉이나 MBC 〈음악여행 라라라〉처럼 인디진영 싱어 송 라이터들이 공중파를 통해 스스로를 알릴 수 있는 장이 늘어나면서 상황은 더욱 확연해졌다. 사람들은 '진짜 음악'을 듣고 즐기기 위해 어딜 찾아야 할지 깨닫기 시작했다.


장기하와 〈워낭소리〉의 차이는


장기하의 출연은 크라잉 넛 이후 가장 급진적인 사건이다. 여기에는 차이점이 있다. 크라잉 넛은 인디진영으로부터 주류음악계로 진출한 사례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경우였다. 씽글앨범 〈싸구려 커피〉와 최근 발매된 정규앨범 〈별일 없이 산다〉로 숱한 이들의 가슴속에 질퍽한 장판 한장의 여유를 안겨준 '장기하와 얼굴들'은, 그러나 진출의 의미보다 확장이나 침입의 느낌에 더 가까이 닿아 있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가 미국에 입성하면서 'British Invasion'(영국음악의 공습)이라는 카피를 등에 업었듯, 장기하의 득세는 대중으로 하여금 인디진영의 음악들에 전에 없던 관심을 갖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국카스텐, 브로콜리너마저, 이장혁, 검정치마,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 다른 인디진영 아티스트들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는 추세다. 앞서 설명했듯 인디진영에 좋은 의미의 인재들이 편중될 수밖에 없는 시장 사회적 배경에, 장기하가 보여준 노랫말 서사의 파격과 재미가 맞물린 결과다.


시기가 맞물려서인지 〈워낭소리〉와 장기하를 비교하려는 시도가 많다. 〈워낭소리〉는 독립영화계의 기적이다. 혹자들은 〈워낭소리〉가 전체 독립영화계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홀로 영웅이 되어버린 사례라 지적한다. 더불어 장기하도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 한숨 섞인 성토를 남긴다. 그러나 이는 둘 사이 서로 다른 시장상황을 적확하게 따져보지 못한 판단이다. 장사가 안되는 건 매한가지다. 그러나 영화 쪽은 배급이 문제의 팔할이다. 주류 상업영화의 형편과 비교해볼 때 독립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나 배급구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워낭소리〉는 초반의 유명세 덕에 여타 독립영화의 상투적인 배급 통로를 벗어나 수많은 극장에서 상영될 수 있었다. 왜 〈워낭소리〉 이후의 다른 독립영화는 그만큼 관심을 얻지 못하느냐고 지적하는데,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런 영화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간다. 이 영화가 독식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그건 〈워낭소리〉 본연의 욕심이나 편식하는 관객의 문제라기보다 배급환경의 문제에 가깝다. 음반시장의 경우 배급시장의 진입장벽이 영화 쪽만큼 배타적이지 않다. 규모가 작은 꼭 그만큼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 영화의 경우 이런 융통성이 도저한 제도적 환경에 의해 도무지 빛을 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저 수사적으로 단순 비교하고 말 일이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워낭소리〉든 장기하든 인디진영 작가들을 향한 대중의 환기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만큼은, 그 환기의 총량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을 떠나서라도 여전히 남는다. 한번에 변하는 건 없다. 그걸 독식으로 폄하하는 건 해석을 위한 조바심에 불과하다. 어쨌든 대세는 기울고 있다.

2009.3.18 ⓒ허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