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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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변화하는 21세기 국제정치와 미중관계의 미래

전재성 / 서울대 교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새해에 접어들면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구글 사태, 대만에 대한 65억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무기 판매, 중국 환율정책에 대한 미국의 비판 등 양국간 긴장은 2월 18일로 예정된 오바마 대통령과 달라이 라마의 회동에서 정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기후변화협약, 이란 핵개발, 중국산 철강 및 미국산 닭고기를 둘러싼 무역분쟁 같은 다른 이슈들도 도사리고 있다.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다양한 사안들은 양국관계가 얼마나 긴밀히 얽혀 있는가를 방증한다.


이처럼 서로 상승작용을 하고 있는 사안들이 올해 시작된 것은 아니다. 대만에 대한 무기 수출은 부시 전 대통령 때부터 약속된 것이었고, 이번 판매에서는 F-16이나 디젤 잠수함 등 민감함 품목이 제외된 터다. 달라이 라마와 미국 대통령의 회동도 정기적으로 있어왔던 행사이며, 작년 미중 정상회담을 고려해 미루어진 것에 불과하다. 환율분쟁은 더욱 오래된 문제이다.


전략적 협력과 경쟁의 복잡한 셈법


전략적 협력과 경쟁을 반복한 탈냉전기 미중 관계사에서 최근 몇달의 긴장은 새롭지 않다. 양국간 전략적 협력의 필요성이 여전히 굳건한 상황에서 지금의 긴장도 새로운 협력의 국면으로 전환될 것이다. 구글 사태는 기업에 대한 중국 당국의 통제 문제이니 양국이 운신할  여지가 있으며, 달라이 라마와의 회동 역시 일회성 이슈로 상호비난을 거쳐 시간이 흐르면서 안정될 것이다. 환율과 교역 등의 난제들도 앞으로 오랜 기간 껴안고 가야 할 것이지 양국관계를 단기간에 악화시킬 계제는 아니다.


양국이 사용할 수 있는 정책수단도 경제적·외교적 부문으로 제한되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올해 중간선거를 앞두고 대중국 전략의 분위기를 일신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중국 지도부 역시 점증하는 자국의 자존감에 따라 미국에 목소리를 높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작년 1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글로벌 파트너로서의 관계는 당분간 구조적으로 지속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서 중국의 책임있는 지도력이 필요하며, 중국은 21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경제성장과 정치안정을 도모해야 하기에 미국과의 다각적 협력이 불가피하다.


지구적 리더십의 지각변동 시작됐다


오히려 단편적 이슈들의 배경을 이루는 '힘의 구조'가 천천히 변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 세력균형의 변화다. 섣부른 G-2 담론에 대한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지구적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인식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다. 이제 중국은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자 외환보유국이며,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강국으로 자리잡았다. 인근지역은 물론 세계의 모든 문제에서 중국의 리더십은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이다. 세력이 강화된 만큼 발언력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세계질서는 미래 중국의 몸집이 반영된 것이 아니기에 앞으로 세계은행과 IMF 등 주요 경제기구나 많은 지역안보기구에서 중국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이다. 중국의 책임있는 리더십에 대한 세계의 기대도 함께 고조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중 간 게임이 재현될 때 중국의 입지가 한층 강화될 것은 확실하다.


이에 비해 미국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미국은 9·11사태로 비롯된 안보위기, 부시행정부 시기의 정당성 위기, 그리고 최근의 금융위기 등 삼중의 위기를 겪으면서 세계 유일 지도국으로서의 지위가 크게 손상되었다. 대응해야 할 위협은 급격히 늘어나는 한편, 정책자원은 부족하다. 수그러들 줄 모르는 지구적 테러 위협과 소위 불법국가들을 상대해야 하고, 환경·에너지·대량살상무기 등 새로운 이슈들에서 리더십을 보여야 하며, 아프간전쟁을 마감해야 하고, 기존 강대국들의 외교적 협력을 구해야 한다. 경제위기 이후 국방비는 제한되고, 국내정치적 지지가 흔들리고,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며, 국제공조를 얻어내야 하는 어려움도 같이 겪고 있다.


근대 패권경쟁, 지배와 도전의 역사


근대 국제정치가 주는 교훈은 모든 패권은 반드시 쇠락했고, 패권의 자리는 다른 국가에 승계되었다는 것이다. 패권의 쇠락은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패권이 세계를 관리하는 동안 지불했던 비용이 너무 커지면,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부상국가가 서서히 자라나 결국 기존 패권에 도전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 비극적인 교훈은 이 과정에서 대개 무력의 요소가 개입된다는 점이다. 패권을 둘러싼 경쟁은 끝내는 군사력에 의해 조정되었기 때문이다.


부상하는 국가가 기존의 패권국가에 버금가는 국력을 소유하게 되면, 기존의 국제정치 거버넌스에 대한 불만족도가 상승하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패권승계 혹은 공동의 패권은 사실상 성립하기 어려워진다. 19세기말 이후 독일은 팽창하는 국력을 발판으로 영국의 패권에 두차례나 도전했다. 통일과 경제발전을 달성한 통일 독일은 기존의 영국 패권체제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세계대전으로 번진 전쟁을 통해 패권에 도전했다. 영국 역시 독일의 발전을 경계하여 강한 견제수단을 사용하고 독일의 발전을 묶어둘 정책을 취했다.


미중 갈등은 2010년대를 여는 가장 중요한 국제정치 사건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는 거의 모든 이슈에 걸친 국제적 거버넌스, 동아시아를 위시한 주요 지역의 지역질서, 그리고 미래 협력가능성에 관련된 문제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특정 이슈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서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게임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점증하는 세력균형의 변화 혹은 세력전이의 구조적 토대 위에서 중국은 미중 갈등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미국도 이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써 중국의 부상에 대한 책임있는 태도를 요구하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다양한 제도권력과 사회적 행위자의 출현


미중의 경쟁은 향후 군사적 대결로 치달았던 근대 국제정치의 강대국 경쟁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21세기 국제정치는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국가간 상호의존도가 심화되었고, 미중 양국도 예외가 아니다. 패권경쟁 과정에서 군사적 수단이 유용해 보이더라도 핵과 같은 파괴적 무기가 존재하는 한, 대규모 패권전쟁도 발발 가능성이 낮다. 테러나 환경 같은 지구 공동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국가간 경쟁에 한계가 명백해진 것도 사실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국가 이외의 행위주체들, 특히 국제기구나 국제제도, 기업 및 비정부기구 등의 사회적 행위자들, 그리고 지구시민사회 같은 새로운 주체들의 중요성이 증가함으로써 개별국가들의 행동은 새로운 권력장을 배경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세계화·민주화·정보화된 사회에서 어느 국가가 국제제도에서 정당성을 획득하여 제도적 권력을 차지하느냐, 세계를 이끌어갈 이념과 지식, 문화를 제시하느냐, 다른 국가들은 물론 지구시민사회의 지지를 얻어 정당한 지도국의 지위를 차지하느냐가 새로운 권력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양대 강국의 각축 속에서 한반도는


미중 양국 역시 새로운 권력장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할 수 있는 쏘프트파워 경쟁, 제도적 영향력 경쟁, 그리고 매력 경쟁에 돌입해 있다. 미국은 부시 행정부 시기의 군사 일방주의 실패를 거울삼아 정당한 지도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구글 사태 이후 힐러리 국무장관은 중국을 비판하기보다는 인터넷 자유론을 제시하면서, 지구인의 마음을 장악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강대국들의 세력균형 변화와 21세기 국제정치의 거시적 변화, 두가지 모두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중 갈등과 협력은 한국의 전략적 관계 수립과 북핵문제 등 당면 이슈의 향방을 결정하게 된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모두와 이중의 전략적 관계를 유지해가면서 양국이 본격적인 갈등국면에 접어들 것에 대비하여 북핵과 통일 등 주요 문제 해결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거버넌스적 혹은 네트워크적 국제정치의 등장 속에서 쏘프트파워를 강화하는 중견국은 이전보다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세계적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거시 이행 속에서 새로운 권력장, 즉 마음과 문화의 권력장, 싸이버 권력장 등의 추이를 지켜보며 나름의 권력자원을 강화하는 장기적 노력을 본격화해야 한다.


2010.2.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