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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없이는 ‘진보’ 어렵다

김기원 /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


복지가 시대의 화두다. 진보교육감들의 무상급식 공약이 인기를 끌고, 민주당이 여기에 편승해 재미를 톡톡히 보면서, 복지확대는 대세가 되었다. 한나라당 쪽에서도 박근혜 의원이 이미 작년에 맞춤형복지를 선보였고, 소장파는 물론 원내대표까지 반값 등록금 등 '좌클릭'에 동참하고 있다.

 

수구보수 언론들이 한나라당에 '제발 자신의 가치를 잃지 말라'고 연일 충고해대고 있지만, 딱히 내세울 만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 처지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MB가 들고 나왔던 '경제 살리기'나 여당의원들이 쏟아냈던 '뉴타운'의 사기성은 국민이 간파해버린 상황이 아닌가.

 

그러니 남북한 평화, 민주주의 회복과 더불어 복지는 내년 선거의 주요 의제가 될 수밖에 없다. 교육을 복지에 포함시키면 복지문제의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

 

압축적 고도성장이 자동적으로 모든 이에게 삶의 수준을 향상시켜주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정보화와 글로벌화로 양극화가 심해진 한국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복지강화 주장에서 간과해선 안될 것들

 

요컨대 '압축적 복지강화'를 둘러싸고 정치세력들 사이의 경쟁이 시작된 셈이다. 우리 사회의 경쟁만능이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런 복지정책 경쟁은 오히려 그동안 너무 부족했던 게 문제였다.

 

전문가들도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상당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처럼 구체적 실천방안도 만들어지고, 등록금 문제에서처럼 오랜만에 생산적 논쟁도 전개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여러가지 기발한 정책 아이디어를 개발해 밀어붙이기만 해서 만사형통인 건 아니다. 복지강화가 가능한 정치경제적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사회의 자원배분 방식을 바꾸는 복지강화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세금부담률을 높인다든가 토건사업을 축소한다든가 하면 직접적으로 손해 보는 집단이 생긴다. 복지의 강화가 삶의 안정성을 증대시켜 궁극적으로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하더라도, 근시안적 사고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이를 깨닫는 건 쉽지 않다.

 

복지강화를 위해선 현명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셈이다. 추진세력을 집결하고 반대세력을 약화시켜야 하며, 특히 무상급식의 경우에서 보듯이 중간층을 견인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의 우선순위도 중요하다. 먼저 대중적 지지가 높은 정책을 통해 힘을 얻은 다음 그 기세로 다른 사안도 끌고 가야 한다.

 

그리고 복지강화, 즉 '진보'를 위해선 시장, 국가, 사회의 '개혁'이 필수적임을 간과해선 안된다. 신자유주의 타령에 빠져 있는 우리의 일부 진보파처럼 시장경쟁을 무조건 악으로 취급한다거나 국가의 효율화나 사회적 신뢰 문제를 도외시해선 곤란하다.

 

공정한 시장경쟁이 전제되어야

 

공정한 시장경쟁을 확립하고 효율적이고 민주적인 국가체제를 발전시키지 못할 때 복지체제가 지속가능하지 않음은 옛 소련·동구나 북한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먼저 시장개혁 문제를 보자. 재벌들이 중소기업과의 불공정 거래로 긁어모은 막대한 이윤과 비자금으로 정계·관계·언론계·학계·법조계를 주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재벌로부터 세금 제대로 거두는 게 용이할 리 없다.

 

장하준 교수 같은 수구적 진보파는 재벌체제를 옹호하면서 복지확대를 주창하지만 이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어느 복지선진국에서도 총수가 기업과 사회에 대해 황제처럼 군림하면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는 없다. 

 

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및 중소기업 노동자) 사이에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직적 노동시장도 사정이 비슷하다. 여기서 대기업 정규직은 다른 노동자에 비해 높은 임금과 기업복지를 제공받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 정규직은 사회복지 확대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반대할 수도 있다. 자녀 대학등록금을 대주는 기업의 노동자가 반값 등록금을 위한 증세에 찬성할 수 있을까. 덴마크처럼 노동시장이 유연해질 때 노동자들은 기업복지보다 사회복지를 선호하게 된다.

 

국가개혁과 사회개혁의 과제들


다음으로 국가개혁은 어떤가. 인도에선 빈곤층에 대한 지원금의 절반쯤이 중간에서 새어버린다고 한다. 국가의 복지전달체계가 이렇게 비효율적이고 부패해 있으면, 충분한 재원 조달이 힘들다. 인도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의 복지행정에도 문제는 많다.

 

또한 세금으로 쓸데없는 토건사업이나 벌이고 그 과정에서 정치자금을 챙기는 구조가 근절되지 않는다면 어느 국민이 흔쾌히 세금을 내겠는가. 이를 바로잡지 않고 복지지출을 늘리려 하면 국가채무가 그리스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재정지출과 관련해 공무원을 비롯한 공공부문도 개혁되어야 한다. 이들 부문 종사자의 보수는 시장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국민에 의한 민주적 견제가 요구된다. 공공부문은 민간부문에 비해 직업이 안정적인 만큼 보수는 낮아야 한다.

 

'공무원 천국'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처럼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말이 생긴 한국에선 공공부문 취업경쟁이 과도하게 치열해 인력배분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나아가 높은 공공부문 보수로 인해 일반대중을 위한 복지재원 마련에 지장이 초래된다.

 

시장개혁, 국가개혁과 더불어 사회개혁도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복지한국을 위해선 노동과 삶에 대한 건전한 자세가 전제된다는 것이다. 복지체제가 악용되는 사회에서는 북유럽 같은 높은 세율에 대한 국민적 동의가 불가능하다.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실업수당에 기생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무상의료라고 병원에 죽치고 누웠거나 공짜 약을 되파는 행위가 퍼지면 복지체제는 붕괴한다. 국민들 상호간의 ‘신뢰’가 결여된 고복지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저복지는 인종문제로 인한 사회적 저신뢰와 관계가 있다. 북유럽은 그 반대로 고복지-고신뢰 사회다. 덴마크 노동부 관계자에게 실업자가 그냥 놀고먹을 위험성에 대해 묻자 “우리 국민은 일하는 걸 좋아한다”라고 답하던 게 인상에 남는다.

 

개혁과 진보의 씨너지를 창출하자

 

요컨대 시장, 국가, 사회의 개혁 없이는 복지확대라는 진보가 힘든 것이다. 다만 그와 동시에 진보가 개혁을 촉진하는 면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닭과 달걀의 관계와 비슷하지만 개혁과 진보는 상호보완적인 셈이다.

 

예컨대 복지확대를 통해 노동자들 사이의 실질소득 격차를 축소하면 기업의 고용조정에 대한 대기업 정규직의 저항이 약화된다. 중소기업에 재취업하는 게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리 되면 기업의 비정규직 사용 필요성도 줄어든다. 복지확대가 노동의 유연성을 향상시키고 노동자들 사이의 분단을 완화하는 노동시장 개혁을 가져다주는 셈이다. 그리고 이는 중소기업의 노동자정착률과 경쟁력을 높여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정경쟁도 개선한다.

 

우리 민주진영엔 복지확대라는 진보의 과제만을 강조하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시장의 공정경쟁이라는 개혁의 과제만을 강조하는 그룹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보았듯이 양자는 올바르게 결합되면 씨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북유럽 수준을 향해 꾸준히 전진해야

 

한편, 복지확대에 냉소적인 사람들도 적지 않다. 북유럽은 복지병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느냐, 몇백만 인구의 북유럽과 5천만 인구의 한국을 어찌 비교할 수 있느냐 등등.

 

하지만 북유럽이 유토피아는 아니라도 요즘 세계금융위기 속에서 미국보다 경제성과가 더 좋다. 사람들의 행복도는 세계 최고수준이다. 인구규모가 복지수준과 무슨 관계를 갖는지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 복지반대론은 선동일 따름이다.

 

북유럽이나 한국이나 세계경제와의 깊은 관련 속에서 끊임없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그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과 충격을 최소화하려면 복지확대가 필수적이다. 이게 ‘시장의 효율성과 삶의 안정성’을 적절하게 결합시키는 것이다.

 

북유럽 수준의 복지를 당장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목표를 그런 방향으로 설정해두면 된다. 그리 해두고 능력과 합의에 따라 복지를 확대하고 동시에 개혁도 추진하다 보면 우리 나름의 모델이 만들어질 것이다.

 

구매력으로 환산한 1인당 GDP로 볼 때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그러나 삶의 질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선진국이다. 개혁과 진보는 이를 바로잡는 길이다. 양자의 상호보완성을 인식하면서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보자.

 

2011.6.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