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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빚쟁이 대학생이 아닌 빛나는 청춘이고 싶다: 6‧10 반값 등록금 집회에 다녀와서

심해린 / 이화여대 학생, 대학생나눔문화 팀장

 

드디어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통행금지보다 무섭다는 시험기간을 뚫고, ‘생각 없는 20대’라는 무시와 자조를 넘어서. 요구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선거공약이었던 반값 등록금 정책을 조건 없이 이행하라는 것이다.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100명 가까운 학생을 연행하고 탄압했지만 반값 등록금 집회는 6월 10일로 13일째 이어졌다. 서울 청계광장에 발 디딜 틈 없이 모인 학생들은 서로를 확인하며 감격했고, 기성세대는 “드디어 20대가 깨어났다”고 환호했다. 언론도 앞다퉈 대학생이 주인공이 된 첫 촛불을 알렸다.

 

대학생들이 ‘반값 등록금’을 외치며 거리에 서기까지, 울부짖고 싶을 만큼 꾹꾹 눌러온 고통은 너무 컸다. “좋은 대학 가야 인생 핀다”는 말에 운동장보다 교실 의자에, 우정보다 경쟁에, 배움보다 자격증에, 희망보다 절망에 길들여져왔다. 그 끝에 청년실업과 비정규직과 또다른 경쟁만이 기다린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돌이킬 수도 돌아갈 곳도 없기에 애써 눈 감고 귀 막아야 했다. 취업과 스펙 경쟁은 차치하고라도, 누가 도서관에 좋은 자리를 잡는지, 누가 더 멋진 남친을 사귀고 예쁜 옷을 입는지까지도 뒤쳐지지 않아야 마음이 놓일 만큼 경쟁은 우리 일상과 영혼 깊이 내면화되었다.

 

단순한 해답, 안 풀리는 물음

 

비단 대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된 노동으로 온 삶을 바쳐도 자식 앞에서 “능력이 없어 미안하다”고, “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눈물지어야 하는 수많은 어머니 아버지부터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된 졸업생, 살인적으로 진화하는 경쟁에 “죽지 못해 산다”는 중고생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대학에 인질로 잡힌 ‘대학민국’을 살아가고 있다. 현실이 이렇기에 반값 등록금을 넘어 무상교육 실현은 보편적 복지와 경제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큰 걸음인 것이다.

 

그런데 반값 등록금이라는 단순한 해답 앞에, 풀리지 않는 물음들이 생긴다. 왜 여당과 보수인사까지 온사회가 지지하고 나서도 동맹휴업은 부결되고, 같은 고통을 겪는 수백만 대학생들은 나오지 않는 걸까? “집회에 나갈 시간에 기말고사 공부가 이익 아닐까”라는 계산이 본능적으로 돌아가는 20대의 심장은 ‘이익싸움’에 뜨겁게 뛰지 않았다.

 

또다른 물음. 햄버거에 치킨에 피자까지 쏘며 “우리가 도울 테니 거리로 나서라”는 ‘선배부대’의 격려가 고마우면서도, 왠지 불편한 이유는 뭘까? 지금까지 “공부만 잘하면 뭐든 해줄게”라는 말에 ‘어른아이’로 길들이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거짓 희망과 헛된 위안의 ‘소비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았는가. 우리가 주인이 된 집회 현장에서도 자존감과 자율성에 대한 목마름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집회 현장을 지나는 이들에게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어휴, 얘네들 너무 불쌍해”라는 말에 나는 정말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아, 우리는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힘들고 엄혹한 시절에도 스무살이 ‘불쌍한 존재’였던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역사상 최초로 ‘불쌍한 젊은이’가 되어버렸다.

 
반값 등록금을 넘어 온전한 삶으로

 

이제 나는 가장 중요한 물음 앞에 서 있다. 그래, 반값 등록금이 실현되면 우리 삶은 어떻게 바뀔까? 1년에 500만원을 ‘덜 빼앗긴다면’ 당장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거나, 학비 마련을 위해 밤새 편의점 알바를 뛰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돈과 시간은 어디에 쓰게 될까? 얼마 지나면 더 많은 자격증 학원에, 더 좋은 해외유학에 쏟아붓게 되지 않을까? 그러려면 다시 알바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지 않을까? 더 뾰족해진 피라미드에 오르기 위한 조건은 오히려 늘어날 것이고, 그만큼 목마름과 무기력은 커질 것이다. 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등록금보다 더 근원적인 고통의 실체를 바로 보아야 한다.

 
첫째, 일자리 문제다. 좋은 직장이 보장된다면 등록금을 두배 내고라도 대학에 다니겠다는 것이 20대의 솔직한 심정일 터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 삶의 방식이 더욱 기계화되고 도시화될수록 자급자립의 삶은 사라지고, 자본권력이 삶을 움켜쥘수록 자격증화, 인간부품화, 청년실업 문제는 필연일 수밖에 없다. 우리 젊은이들은 그저 일자리를 달라고 떼쓰는 데 그칠 수 없다.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노동, 양심을 팔아야 이익을 얻는 노동, 창의성과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하게 하는 이 세계경제 씨스템에 대한 근원적 도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대학 자격증 씨스템이다. 우리를 하나의 잣대로 줄 세우는 ‘대학 자격증 씨스템’을 넘어서야 한다. 2010년 3월 고려대를 자퇴하며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김예슬 선언’에서 말하듯, “대학은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지 오래다. 대학 졸업장에 따라 ‘등급’이 주어지고 인간성의 우열과 인생까지 규정되기에, 우리는 하나뿐인 성공과 하나뿐인 행복의 잣대에 맞춰 대학 문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항의 한 걸음, 탈주의 한 걸음

 

무엇보다 우리 고통의 핵심은 “내 삶의 결정권이 나에게 없다”는 무력함일 것이다. 돈과 시장에 대한 완벽한 의존, 자율적 삶의 완벽한 상실 속에서 우리는 ‘착한 학생’과 ‘똑똑한 소비자’로 길들여져왔다. 그 결과 우리에겐 ‘어른아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반값 등록금과 복지국가는 실현되어야 하지만, 먼저 ‘내가 꿈꾸는 삶’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때다. 새로운 삶의 내용과 가치 없이 ‘제도’만 외칠 때 우리 인생은 또다시 증발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관심과 요구와 열정이 반값 등록금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다.

 

본디 젊음의 본능은 저항하고 부딪치고 고뇌하며, 그래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다른 미래를 열어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지금껏 불온한 젊은이들의 부르짖음으로 역사는 진보해왔다. 선배세대가 이룬 빛나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위에서, 이제는 분명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6월항쟁이 24돌을 맞던 그날 밤, 우리는 함께 살아 펄떡이는 심장을 느꼈다. 20여년간 교실에 갇혀 잃어버렸던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자동차가 주인이던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진짜 축제를 즐겼다. 우리가 느낀 이 해방 체험, 뜨겁게 하나된 감동, 자유와 민주주의의 달콤함은 몸과 가슴에 새겨졌다.

 

스무살 젊음이 가진 것은 꿈꾸는 심장과 젊은 근육, 세계와 통하는 빛나는 지성이고, 잃을 것은 거짓 희망과 무력감과 일자리 없는 절망의 현실뿐이다. 우리, 젊음을 앗아가는 것들에 저항의 한 걸음을 내딛자. 그리고 내가 먼저 좋은 삶 쪽으로 탈주의 한 걸음을 내딛자. 그렇게 20대의 진정한 희망과 새로운 길 찾기가 시작될 것이다.

 

2011.6.1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