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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당신이 발설하지 못한 괴물: 영화 〈화차〉가 말해주는 ‘채무’의 사회적 무의식

황승현 / 문화평론가
 
* 이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화차〉(감독 변영주)는 차에 탄 두 연인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결혼을 앞둔 문호(이선균)는 약혼녀 선영(김민희)을 태우고 본가를 찾아간다. 휴게소에서 내린 문호가 호두과자를 사오는 사이 선영은 사라진다.

 

〈화차〉는 한국사회의 무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다. 한국사회의 심리적 맥락을 감안하여 일본 원작의 틀을 과감하게 수정한 결과다. 약혼자였던 문호가 끝까지 선영을 찾는 것도 원작과 다르다. 자신이 찾는 선영이 실은 진짜 선영을 죽인 경선이라는 걸 알게 된 문호는 경악한다. 사채업자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선영의 신분이 필요했던 경선은 완벽한 신분세탁을 위해 선영을 살해했던 것이다. 문호는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절규한다.

 

그런데 문호는 정말 악몽과 마주한 것일까. 질문을 바꿔보자. 결혼을 앞둔 문호에게 가장 끔찍한 악몽은 과연 무엇인가. 만일 문호가 선영을 찾았는데, 그녀가 진짜 선영이고 살인자도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녀가 누군가를 죽이고 가짜 신분으로 사는 처지여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삐죽 문호의 콧구멍을 빠져나온 털에 문득 진저리가 나서 사라진 것이라면? 급박한 처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적한 게 아니라 그냥 문호가 싫어서 떠난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바로 문호의 진정한 악몽이 아닐까.

 

우리에게 진짜 '악몽'이란 무엇일까

 

문호는 경선을 찾자마자 날 사랑하기는 했느냐고 따져 묻는다. 경선이 그냥 떠난 것이었다면, 구차해 보일까봐 그런 질문은 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즉 문호의 진정한 악몽은 다행히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것이다. 문호가 악몽을 만난 듯 울부짖었던 것도 진정한 악몽의 존재를 숨기려는 영악한 허세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대상이 공개된다는 건 자신의 욕망과 한계가 적나라하게 폭로된다는 뜻이니까.

 

신분도용도 모자라 살인까지 저지른 경선은 본인도 인정하듯 괴물이다. "나, 사람 아니야." 그런데 정말 경선은 괴물일까. 이번에도 질문을 바꿔보자. 만일 영화와 달리 경선이 의도적으로 사채업자를 기만하려 했다면 어떻게 되는가. 어쩔 수 없는 빚의 굴레에 휘말린 것이 아니라 동네 건달이랑 짜고 사채업자를 등치려 했다면? 평균적 한국인으로 교양과 균형감각까지 지닌 당신은 이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무리 악덕 사채업자의 돈이라도 남의 돈을 일부러 떼어먹어서야 되겠느냐고.

 

그동안 당신이 사채업자에 유린당한 사람들을 보며 가슴 아파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채무를 갚을 능력은 없을지언정 모름지기 채무는 갚아야 한다고 믿는 선량한 채무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만일 그들이 고의로 돈을 떼어먹으려 한 '악덕' 채무자라면 사채업자에게 아무리 잔인한 짓을 당하더라도 당신은 별로 안타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이제 비로소 진짜 괴물이 등장한 것이다. 당신의 무의식은 지금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남의 돈을 일부러 갚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악덕 사채업자보다도 못한 진짜 괴물이라고.

 

그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괴물은 따로 있다

 

영화는 경선을 악마 같은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다 괴물이 된 존재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분을 도용하거나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손쉽게 한국 사회의 괴물이 되는 방법이 있다는 걸 영화는, 아니 한국 사회는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사회가 진정 두려워하는 괴물은 악덕 사채업자에 쫓기다 살인까지 저지른 채무자가 아니라 악덕 사채업자의 돈을 그냥 떼어먹는 채무자다. 그런데 경선과 달리 그들은 아예 괴물로 인정받지 못한다. 주시해야 할 괴물이 아니라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회적 낙오자로 '강등'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철저한 외면이야말로 그들이 진정한 괴물이라는 징표가 아닐까.

 

약점과 급소를 환기시키는 존재는 괴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부끄러운 실체를 숨기고 싶은 당사자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괴물이 알려진다는 건 괴물이 자극하는 자본주의의 약점과 급소도 함께 공개된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체제가 괴물을 보고도 아닌 척 외면하는 이유다. 영화 속 인물들이 경선을 향해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한 것도 진정한 괴물이 따로 있다는 걸 감추려는 무의식적 호들갑은 아니었을까. 문호가 자신의 진정한 악몽을 들키지 않으려 짐짓 최악의 악몽을 만난 척 과장했던 것처럼.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적 채무는 대개 도덕적 채무와 동일시된다. 빚을 지는 것은 자연스럽게 비윤리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미디어의 광고는 항상 각종 금융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끊임없이 빚을 권하면서도 동시에 죄책감을 집요하게 주입하는 것이다.

 

이는 과도한 빚으로 파멸되더라도 빚을 유도한 자본주의체제 대신 채무자 자신을 탓하게 만들려는 사회심리적 책략이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빚을 갚지 않는 악덕 채무자는 자본주의의 이 체계적 전략을 위협하는 진정한 '괴물'이다. 악덕 사채업자에게 희생당한 여성이 아니라 악덕 채무자에 주목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의 급소를 자극하는 다음의 질문과 비로소 마주할 것이다. 과연 채무를 일부러 갚지 않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진정한 문제는 빚을 강권하는 자본주의의 생리가 아닌가.

 

2012.4.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