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성장‧발전 동력으로서의 에너지전환
이일영 / 한신대 교수, 경제학
진보개혁세력의 실책과 자멸적 행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세계경제와 서민경제의 불안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유럽이 난조를 보이는 한편 지도부 교체기에 들어선 미국과 중국은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경제에는 장기불황의 조짐이 뚜렷하다. 이에 대해 특히 가난한 이들의 두려움이 크다.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한 중년 남성의 말이 이러한 두려움을 웅변한다. "IMF 때만 생각하면 끔찍하다. 나라가 다 망한 거 아니었나. 나라가 망하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한겨레> 2012.5.15)
현재 한국사회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정서는 불안감이다. 노년층이거나 청장년층이거나, 빈곤층이거나 중상류층이거나, 모두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정치권의 화두가 된 복지개혁이나 재벌개혁이 모두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먹고살기 어렵다'는 다수 국민의 불안감을 그것만으로 해소해줄 수 없다. 앞서 인용한 빈곤한 남성은 "나라가 잘살아야 우리도 잘살 수 있다. 최근에 복지가 많이 좋아진 건 그나마 나라가 잘살게 돼서 그런 거 아닌가?"라고 말을 잇는다. 이 말이 정곡을 찌른 측면이 있다.
먹고살기의 불안감을 걷어내려면
21세기에는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경제사적 전환이 불가피하다. 19~20세기는 서구의 산업화와 시장 확대에 의해 경제성장이 이루어졌고 이는 화석연료 에너지로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지구 차원에서의 자원 제약을 고려하면 이러한 산업혁명 모델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서구시장에 의존해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동아시아 성장모델도 결국은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제 많은 국민은 현재 삶의 방식이 지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위기를 직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장과 발전을 중단하는 것이 집합적 의사결정의 결과가 되기도 어렵다. 국내적 차원은 물론 세계적 차원에서도 유기적으로 연계된, 지속 가능한 성장과 발전의 구체적 방책이 제시되어야 할 시점이다. 기술의 채용은 종종 느리고 과묵하며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만, 사회가 필요한 정도의 수용성을 갖추면 그 속도는 마술처럼 빨라지기도 한다. 태양과 바람은 지금까지는 보잘것없는 에너지원으로 취급되었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화석연료 가격이 계속 상승하고, 원자력 이용의 한계가 분명해졌다. 이제 진부한 해결책만 반복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치고 있고 에너지전환을 통해 기존에 주어진 성장·발전 가능성의 한계를 돌파하는 출발점 직전에 다다른 것 같다.
에너지전환, 새로운 성장·발전의 동력
최근 일본의 상황은 에너지전환을 새로운 성장·발전모델로 만들어내는 것이 분초를 다투는 절박한 과제임을 보여준다. 지난해 3월 11일 대지진으로 후꾸시마 원전에서 방사능이 누출된 이후 원자력 발전을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가 되고 있고, 지난 5월 5일에는 홋까이도오(北海道)의 토마리(泊) 원전 3호기가 정기검사를 위해 발전을 중단하면서 원전 제로(0) 상태가 되었다. 토오꾜오전력(東京電力)은 이미 기업들에 대해 전기요금을 평균 17% 인상한다고 발표했고, 전력 부족이 예견됨에 따라 천연가스를 이용해 열과 전기를 발생시키는 씨스템의 사용이 늘어나고 있다.
마침 한국은 에너지전환의 국제·지역협력의 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최대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인 미국과 중국이 아직 머뭇거리고 있지만, 일본은 에너지전환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한국은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의 연결점이라는 지경학적 유리함이 있고, 건설·조선·IT·물류 분야의 기술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결국은 탄소를 바탕으로 한 산업구조의 전환이 불가피한 만큼, 최근 논의되고 있는 '아시아 수퍼그리드'(super grid) 구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수퍼그리드란 광활한 지역에 퍼져 있는 풍력·태양열·원자력 등 각종 발전시설과 여러 도시를 잇는 고압전력망을 가리킨다. 일본 쏘프트뱅크 회장 손정의는 바람과 햇볕이 남아도는 몽골 사막에서 전기를 만들어 일본이나 한국의 대도시에 공급하자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몽골 풍력자원의 잠재력은 연간 일본 전력소비의 8배, 한국 전력소비의 23배를 감당할 수 있다고 하지만, 문제는 여러 국가와 다양한 주체들의 협력이다. 우선 한국·중국·일본 정부 사이에서 에너지전환을 위한 협력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한국·중국·일본은 나라별로 에너지 공급과 소비 체계가 다르지만 강력한 국가 규제가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원자력발전의 비중을 조절해야 하고 낮게 형성된 전력가격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정부 차원에서 국가간 송전망 개발, 전력거래 확대, 재생에너지 비중 증대 등을 과제로 하는 네트워크를 가동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재생에너지 산업과 네트워크 실험
에너지전환은 지역의 성장·발전 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 산업 발전은 중앙정부 주도의 위계적 산업정책과는 잘 맞지 않는다. 수평적 경제구조로의 전환이라는 대세에 부합하여 광역경제권 형성과 연결되는 새로운 산업정책 모델이 개발되어야 한다. 아직 본격 추진되지는 않고 있으나 호남권, 대경권, 충청권 등 3개 광역경제권이 재생에너지 및 그린에너지 산업분야를 선도사업으로 선정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광역경제권 간에 중복투자를 피하고, 중앙정부가 이끌기보다는 지방분권과 민간주도 방식으로 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자체-대학-연구소-기업 간 네트워크의 활성화, 학교기업의 창업, 여러 기업들의 조인트 벤처 설립 등 다양한 조직형태의 실험이 필요하다.
특히 호남권의 경우 지역균형발전과 자연여건 면에서 재생에너지 산업에 유리하다. 호남권 면적은 전국의 21%를 차지하고 있으나, 인구와 GDP는 10% 수준이다. 이에 비해 전국 최대의 일조량, 긴 해안선, 높은 조수차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특히 대륙붕이 길게 이어지고 수심이 얕아서 풍력발전기 타워를 설치하는 데는 최적의 여건이다. 호남권은 세계 굴지의 해 상풍력 에너지 생산기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셈이다.
3차 산업혁명을 준비하자
좀더 작은 규모의 지역 에너지 자립체제의 실험도 필요하다. 분산형 에너지체제는 지역 차원의 재생에너지의 생산과 이를 이용한 난방설비의 보급을 통해 형성된다. 기업의 창업과 이주, 생태 관광객의 증가, 비전을 개발하고 이를 지역정치에 통합한 핵심그룹, 지방정부 및 중앙정부와 연계된 연구센터, 지방정부와 주민의 투자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자체, 지역기업이나 발전업자, 주민과 NGO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에너지와 인터넷을 결합한 '제3차 산업혁명'을 언급한 바 있다. 새로운 산업혁명은 국제협력, 정부, 기업, 시장, 지역, 시민사회가 어우러지는 생태계 속에서 진전될 수 있다. 에너지전환이 새로운 동아시아의 성장·발전 모델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2012.5.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