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북한의 수해지원 제안 수용과 남북간 민간교류
강영식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
북측이 우리 정부의 수해지원 제의에 화답해왔다. 통일부는 10일 "북측이 오늘 오전 판문점 적십자채널을 통해 수해지원을 받겠다면서 지원 품목과 수량을 알려달라고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북측의 이러한 입장 통보는 우리 정부가 지난 3일 대북 수해지원을 제의한 지 7일 만에 나온 것이다.
이에 앞서 남쪽 민간단체들은 지난 8월 북측과 만났다. 국내 53개 대북지원 민간단체들의 협의체인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대표단이 8월 24일 개성을 방문한 것이다. 필자를 포함, 4명으로 구성된 북민협 대표단의 개성 방문은 북측의 수해에 대한 지원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북민협 대표단의 방북에 앞서 월드비전도 그 일주일 전에 개성을 방문, 북측 관계자들과 협의를 진행한 바 있다. 북한은 결국 남쪽 민간단체들의 수해지원 제의에 먼저 수용 의사를 밝힌 후 정부의 제안에 화답해온 것이다.
북한의 화답, 그 배경에는
남쪽의 수해지원 제의에 대한 북측의 이러한 수용은 상당한 기간의 검토 끝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8월 24일의 개성 협의에서도 북측 관계자들은 매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관계자는 "현재 남북관계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번 접촉을 계기로 민간의 교류를 재개, 꾸준히 협력해나가자"고 말했다. 현재 긴급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이 밀가루와 의약품 정도라고 필자가 설명했음에도 민화협 관계자는 감사를 표시했다. 다만 남쪽에서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에 대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전면적 반공격전을 위한 작전계획을 검토하고 최종 수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이 흘러 부담이 적은 시기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민간단체들에 이어 우리 정부의 수해지원 제의를 북측이 수용한 것은 매우 환영할 일이다. 인도적 지원을 포함한 민간단체의 대북교류도 남북 당국간의 대화 없이는 원활하게 진행될 수 없다. 남쪽 당국은 민간단체가 추진하는 모든 대북교류의 승인권을 갖고 있으며 북측 역시 형태는 다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남과 북의 모든 교류는 남과 북 당국이 대화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더욱 확대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김정은 체제의 북한에서 최근 흘러나오고 있는 소식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지난 6월 28일 밝힌 경제방침에서 기업과 개인, 농민의 생산물자 자율처분권을 확대하는 방안을 발표했다고 한다. 오는 10월부터는 국영기업 및 상점의 수익 중 30%만 회수하고 나머지 70%를 기업 등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체적인 내용도 전해졌다. 북한의 이러한 경제개혁 조치는 군(軍)이 쥐고 있던 경제사업을 내각으로 이관하는 과정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인민생활 개선을 목표로 하는 북한의 경제개혁 조치들은 필연적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유지될 때 그 성과를 낼 수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최근 발언은 그 자신이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난 8월초 평양을 방문한 왕 자루이(王家瑞) 중국공산당 연락부장을 만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조선은 계속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경제발전과 국민생활 개선으로 북한 국민이 문명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이 조선노동당의 목표"라고도 했다고 전해진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좋은 기회, 유념해야 할 것들
한반도의 평화 유지를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개선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몇년간의 남북관계는 더이상 나빠질 수도 없는 거의 최악의 상황이다. 북한의 이번 수해지원 제의 수용이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북측은 10일 남측의 제의를 수용하는 통지문에서 "작년과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지난해 우리 정부는 영유아용 영양식과 초코파이, 라면 등 생필품 위주로 50억원 규모의 수해지원을 추진했지만 북측은 식량이나 시멘트, 복구장비 등을 통 크게 지원해 달라는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침묵으로 일관, 지원이 결국 무산된 바 있다. 북측은 올해도 식량과 시멘트, 복구장비 등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남과 북 당국은 이제 서로에게 명분을 주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된다. 우리 정부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수해지원 제안을 했을 것이다. 북측 당국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엽적인 부분에 빠져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유지라는 대의를 놓쳐서는 안된다. 서로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는 대신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수해지원과 관련한 협상을 진행해나가야 할 것이다.
다만 대북지원 민간단체의 한 관계자로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국간의 협상과는 별개로 기왕에 재개된 민간단체의 지원활동에 남북 당국이 과도한 개입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8월말의 개성 방문 이후 북민협을 대표로 하는 대북지원 민간단체들은 밀가루와 의약품 등 기본적인 수재물자 지원을 위해 범국민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캠페인 과정에서 민간단체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정부와의 실랑이다. 정부는 지난 몇년간 민간단체들의 대북지원을 가로막아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추락했다는 점을 교훈삼아 민간단체들이 추진하는 대북지원의 발목을 잡는 일을 그만두고 애로를 풀어주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2012.9.1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