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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밀실행정으로 위협받는 국민의 이익

서상범 / 변호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외교통상위원회 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스 순방 중에 한국철도시장 개방 연설을 한 직후인 11월 5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WTO 정부조달협정(GPA) 개정안을 의결했다. 그리고 곧바로 11월 15일 대통령의 비준을 거쳐, 조만간 이를 WTO사무국에 제출할 예정이다.

 

지난 6월 '철도산업발전방안'을 발표하여 한국철도공사(코레일)를 여객, 물류, 유지·보수 등 6개의 자회사로 분리하는 철도구조 개편방안이 제시된 데 이어 이번 정부조달협정은 철도민영화를 위한 국내외 민간자본 유치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박근혜정부의 철도민영화 로드맵의 전모가 거의 공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소리 없이 진행되는 철도민영화 계획

 

이번 개정안에는 한국철도시설공단과 서울메트로, 서울시 도시철도공사, 인천메트로 등 전국 광역자치단체의 지하철 등 기간 선로산업기관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고속철도가 개방대상에 포함되어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개정안은 지하철·일반철도의 설계, 건설, 감독을 비롯해 시설 운용, 유지보수 등 철도기간망의 거의 모든 내용을 망라하고 있어, 향후 발주 및 입찰시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외국의 민간기업에게도 동동한 조건을 부여해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된다.

 

이 개정안이 발효된다면 유라시아철도 개발계획, 지방자치단체 철도 운영권, 수서발 KTX 등과 맞물려 철도민영화가 급속히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철도는 지난 수십년간 지속적인 민영화 압력 속에서도 공공성을 유지해왔으나 수서발 KTX를 통한 경쟁체제 도입과 정부조달협정에 따른 철도시장 개방으로 전면적 민영화의 도래라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될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 정부가 1997년에 맺은 정부조달협정의 경우 철도와 관련해선 한국철도공사만이 대상으로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번 개정 협정문은 이때껏 경험해보지 못한 광범위한 시장개방인 셈이다. 그러나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정부는 이 문제를 지나치게 속전속결로 처리하려 하고 있다. 일련의 과정이 밀실에서 국민여론 수렴 없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통상조약의 체결 및 이행을 위해서는 '통상조약의 체결절차 및 이행에 관한 법률(통상절차법)'을 따라야 함에도 정부는 법제처의 '이번 정부조달협정의 개정에 기한 국내 법률의 제·개정 필요성이 없어 국회 비준동의가 필요 없다'는 심사결과를 이유로 국회 비준동의를 거부하고 있다.

 

형식논리에 매몰된 정부의 편협성

 

헌법 60조 1항에는 "(국회는)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되어 있다. 또한 통상절차법 제13조 제3항은 "국회는 서명된 조약이 통상조약에 해당한다고 판단할 경우 정부에 비준동의안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법치주의는 인권보장을 목적으로 하여 모든 국가작용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제정하는 법률에 기하여 행하도록 하는 원리이다. 이에 비추어볼 때 헌법 60조 1항이 중요 조약의 체결 및 비준에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한 것은 단순히 조약의 절차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해당 조약이 국가의 중요 정책사항이나 국민의 권리·의무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경우에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적극적 통제를 통해 국민적 합의를 형성하기 위한 실체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취지라 할 것이다.

 

따라서 국내법 제·개정 외에 별도로 국민의 권리, 의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을 규율하는 조약도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정부조달협정 개정의정서 시행과 관련되어 시행령, 규칙 또는 고시의 개정만을 통해서도 협정 개정사항을 반영할 수 있으므로 법률 제·개정이 필요치 않아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법제처의 심사결과는 행정편의적인 해석이라고 보여진다.

 

국민을 위한 신중한 논의가 있어야

 

아울러 이는 국회가 입법과정에서 핵심 법률사항에 대해 지나치게 시행령 및 규칙에 위임하도록 한 입법편의주의와, 정부가 법률의 위임한계를 넘어서는 시행령 및 규칙을 제정하는 위임입법의 한계 일탈이 결합돼 발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통상절차법 9조, 11조 등이 '통상조약 체결에 따른 경제적 타당성과 영향의 평가'를 통하여 통상조약이 국내 경제, 국가재정, 국내 산업, 국내 고용에 미치는 영향 등의 검토를 거쳐 신중히 결정하도록 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채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등 부처 협의만으로 졸속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번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철도시설공단과 서울메트로 등 광역자치단체의 선로산업기관들이 모두 포함되어 철도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만약 이 개정안이 발효된다면 서울지하철 9호선에 대한 프랑스 베올리나(지분 80% 보유)의 선례처럼 프랑스와 독일 등 세계 최고의 철도기술을 보유한 국가들의 기술과 자본이 국내 철도산업에 쉽게 진입하게 될 것이다. 해당 분야에 외국기업이 진출할 경우 국내 철도관련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잠식되고, 도시철도요금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국가경제와 국민의 중대한 재정적 부담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마땅히 국회 비준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한국 철도산업 및 일반 국민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 이번 WTO정부조달협정 개정의정서는 단순히 국무회의 의결이라는 행정편의적인 밀실행정에 의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심의를 거쳐 무엇이 국민일반의 이익에 보다 부합하는가를 신중히 가려 결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3.1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