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동아시아에서의 세력전이와 한국의 선택
김준형 / 한동대 교수, 국제정치
지난 11월 23일 중국이 동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자 미국은 지역안정을 위협하는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행위로 규정하며 곧바로 군용기를 띄우는 등 무력시위로 대응했다. 중국이 설정한 구역이 자신들과 겹치게 된 한국과 일본도 크게 반발하면서 중국과 맞서는 구도를 형성했다. 이에 우발적 충돌은 물론이고 미중 간 패권을 놓고 벌이는 본격적 충돌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번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싼 긴장 고조는 동아시아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미국패권의 침체와 중국의 부상이라는 세력전이가 빚어내는 혼란의 서막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바드대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 교수와 조셉 나이(Joseph Nye) 교수는 '투키디데스의 덫'이라는 역사유추를 통해 현 국제정치를 진단한다. 고대 그리스의 패권전쟁이 아테네의 급격한 부상과 이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았다고 믿었던 투키디데스의 통찰을 차용한 분석이다. 그들은 1차대전 역시 19세기말 독일의 부상에 대한 영국의 두려움이 주 원인이며, 현재 중국과 미국도 같은 덫에 걸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약한 고리가 되어가는 한국의 딜레마
그런데 오늘날 전쟁이 국익증가의 수단으로서 효용가치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과, 높은 경제적 상호의존도를 고려할 때 패권국의 세력전이가 충돌로 이어진다는 견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1909년 베스트셀러 『거대한 착각』을 쓴 경제학자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은 당시 유럽의 경제의존도가 심화될수록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그것은 전쟁에 승리하더라도 상대국을 초토화해 결국 손해를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경제의존은 더 깊어졌으니 전쟁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거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누가 맞는지는 역사가 진행되어봐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한쪽으로 경도되어 자기암시의 숙명론에 빠지거나, 반대로 희망적 사고에만 의지함으로써 대비를 소홀히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상반된 두 의견 모두 절대적 가능성을 얘기하지 않았다. 앨리슨과 나이는 역사적 전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 대한 위험성을 경고했으며, 당시와 현재는 유사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다는 점도 빼놓지 않는다. 에인절도 책 출간 5년 만에 1차대전이 발발하자 어설픈 자유주의자의 거대한 착각이라는 조롱을 당했지만, 책의 핵심 논점은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국익의 관점에서 결코 이로운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그는 정치경제적 무지가 횡행하는 조건 아래서는 오히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질 수도 있다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미중은 아직 전략을 확정하지 않았다. 상대의 협력이 간절하게 필요한 동시에 두려움과 의심이 가시지 않는 미중관계의 패러독스는 진행 중이다. 이번 일만 해도 집단자위권과 센카쿠열도에 대한 일본의 입장에 미국이 표한 공식 지지를 중국이 대중봉쇄 의도로 해석해 방공식별구역으로 대응했지만, 긴장이 고조되자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미국도 수위조절에 나서며 오히려 한국과 일본을 달래는 모양새다. 앞으로 상당기간 이런 방식을 통해 상대방의 의도와 능력을 테스트할 것이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오히려 한국이다. 사건의 본질이 미중의 기싸움이자 중일 간 영토분쟁임에도 파장은 어김없이 한국을 흔들어대고 있다. 일본은 이미 진영을 선택했고 대중봉쇄에 적극적인 반면, 한국은 대중 경제의존도와 대미 안보의존도 사이에서 딜레마적 선택지를 마주하고 있다. 한국이 미중 패러독스 및 아시아 패러독스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쉬운 외교에만 치중하는 박근혜정부
이는 민족의 명운이 걸린 엄청난 외교적 난제지만 중미 사이에서 섣부른 진영외교는 위험하다. 쉽지 않겠지만 가능하면 그러한 딜레마적 선택상황이 조성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남북관계의 개선이야말로 강대국의 요동치는 세력재편에서 우리의 레버리지를 최대치로 늘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박근혜정부는 신뢰를 '전제'로 신뢰하는 국가만 만나서 ‘쉬운’ 외교만 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신뢰하기 어려운 상대도 적극적으로 만나 신뢰를 '구축'해내는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북한은 물론이고 일본과도 끊어진 끈을 이어야 하고, 이번 일로 흔들리는 한중관계도 다잡아야 한다.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에 맞대응하듯이 우리도 곧바로 확대한 것은 다소 성급한 측면이 있었다. 한국이 그렇게 할 권리가 분명 있지만, 긴장을 해소하고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보여주며 명분을 쌓는 것이 더 나은 외교다.
또한 국내여론에 휘둘려 외국보다는 국민을 대상으로 외교하는 것은 마땅히 지양되어야 한다. 이번 사태를 틈타 한·미·일 삼각동맹을 선택해 중국봉쇄에 나서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배타적 민족주의와 군비확장의 안보포퓰리즘이 조성되는 것은 국익을 위해 결코 이롭지 않다.
2013.12.1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