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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칼럼] 사회통합,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백낙청 /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이명박정부 5년간 한국사회는 갈등과 분열로 거의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국민대통합과 '100% 대한민국'을 공약한 새 대통령이 들어선 뒤의 사정도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한 게 없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난 23일에는 민주노총 사무실에 경찰병력이 강제로 진입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져 한국노총을 포함한 노동계 전체가 정부에 등을 돌리고, 취임 1년차 대통령에 대한 사퇴요구가 종교계와 시민단체의 범위를 넘어 나날이 번져가는 형국이 되었다. 한 대학생의 대자보가 던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요,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답변이 전국에 메아리치고 있기도 하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100% 통합은 아니고 지금보다는 한결 안녕하고 통합된 사회라도 이룩할 길은 없는 것인가?

 

100% 통합은 위험한 환상

 

바로 그거다. 소중한 것은 상대적 안녕과 생산적 갈등을 확보해줄 수준의 사회통합이지, 인간 사는 세상에서 완전한 통합이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한국사회의 100% 통합을 이룩하겠다는 구상 자체가 실은 위험하기까지 한 것이다.

 

더구나 권력자가 100% 사회통합이라는 환상을 추구하는 순간, 자신을 따르고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소수 불순세력'이 되고 배제와 척결의 대상이 된다. 스딸린이 무갈등사회를 선언한 후로 일체의 반대파가 단순한 반대세력이 아닌 제국주의 첩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히틀러가 독일민족의 총화단결을 외쳤을 때 뜻대로 안되는 모든 일은 유대인이라는 불순요소 탓으로 돌려지게 마련이었다. 군국주의 일본제국에서도 그랬다. 비판세력은 비판적인 국민이 아닌 '비국민'의 낙인이 찍혀야 했다. 한반도의 북녘에서 인권유린과 숙청이 거듭되는 것도 '당과 인민 사이에 털끝만한 틈도 없다'는 정권측의 주장과 무관하달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이 그 점에서 북녘을 닮아가지 않으려면 그와 다른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갈등과 혼란을 아예 제거하려 하기보다 적절한 수준으로 관리하면서 대화와 상호비판을 통해 생산적인 긴장을 유도한다는 민주사회의 원리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현실적인 목표조차 어째서 그토록 달성하기 힘든가를 정확히 짚어내야 한다.

 

북녘 닮아가기를 앞에 언급했지만, 남북한은 흔히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 사회로 여겨지며 실제로 적대적 대치관계에 있다. 그런데도 툭하면 이런 대치관계와 상대방의 책임을 들먹이며 양쪽 모두가 반민주적 억압을 일삼아온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의 북한은 장성택의 숙청과 처형으로 그 왕조적 성격을 새삼 과시한 꼴이지만, 남한도 '제왕적 대통령'의 폐습을 일층 강화하려는 행태가 도처에서 목격된다.

 

남북의 대치관계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태에 대한 책임은 사안별로 따질 일이다. 그러나 대국적으로 봐서 4·19혁명과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그리고 1987년 6월의 시민혁명 등을 거치며 민중의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일구어온 남녘 사회가 북한과 똑같은 정도로 반민주적이랄 수는 없다. 다만 분단체제의 멍에를 지고 있는 한에는 양쪽 모두 창조적인 갈등보다 소모적 갈등이 우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상대방과 내부 불순세력에 돌리는 습성에 젖어 있기에 더욱이나 그렇다.

 

분단체제의 힘과 '2013년체제의 숙제'

 

그러한 습성이야말로 갈등의 실상을 은폐하는 분단체제의 힘이다. 예컨대 오늘날 사회통합이 안되는 주된 원인으로 일각에서 지목하는 '종북주의'가 그렇다. 이는 북한의 존재, 그리고 북한정권의 노선에 동조하는 인사들의 존재가 한국사회의 핵심적 갈등요인이라는 주장인데, 남한의 약 40분의 1로 추정되는 경제력을 지닌 북한이 아무리 핵무장을 하더라도 남한사회를 온통 뒤흔들 수 있는 존재인지, 그리고 북한에 추종적인 일부 인사들이 헌법 제1조를 실질적으로 부정하는 막강한 세력들보다 과연 대한민국에 더 위협적인 존재인지는 그야말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따져볼 문제다.

 

분단체제는 본디 억압적이고 불공정한 체제지만, 1961년부터 1987년 사이의 분단 고착기(固着期)에는 얼마간의 안정성을 띠었고 한국경제의 초기적 발전단계에 유리한 여건을 제공한 면도 있다. 그러나 87년 이래의 동요기(動搖期)에 이르러서는 북핵문제를 포함한 불안정 요소가 날로 가중되면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해법을 요구하게 되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달을 위해서도 국민의 민주적 창의성의 극대화가 절실한 단계로 진입했다. '종북' 여부가 사회의 심각한 쟁점이 될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바뀐 것이다. (실제로 '종북'은 '대선불복' 타령까지 엮어서 아무데나 들이댄 끝에 벌써 다수 국민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거나 식상한 구호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데도 매사를 이념대결로 몰고 가는 행태는 좀더 심층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곧, 기득권세력의 부당한 특권에 대한 일체의 비판과 도전을 봉쇄하려는 전략의 측면이 더 본질적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본인들이 반드시 의식적 계산을 근거로 종북몰이를 한다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사회갈등 조장과 한반도 긴장 악화가 저네들의 사익추구를 오히려 돕지 않는다면, 정부·여당과 각계의 기득권세력이 그 전략을 이토록 애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따라서 이들 기득권세력이 선출된 권력의 자리마저 차지하는 현실을 바꾸지 않고서는 실질적인 국민통합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2012년의 양대선거를 앞두고, 사회통합이 비록 대다수 국민의 염원이지만 당장에 실현할 과제라기보다 '2013년체제' 아래 우리가 풀어갈 '숙제'로 설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2013년체제 만들기는 실패했다. 하긴 2013년 초만 해도 '시대교체'를 약속하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이 13년체제 건설은 아니더라도 새 시대를 향한 어느정도의 기반을 닦아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피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예컨대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좌담 「2012년과 2013년」 참조. 나 자신은 그 자리에서 기대와 더불어 우려되는 대목들을 짚어보기도 했다). 이는 합헌적인 절차로 당선된 새 대통령에게 일단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 87년체제를 성취한 시민으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했고, 이른바 보수진영 출신의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복지확대, 남북관계 개선 등 공약을 부분적으로나마 이행해준다면 그 의제들을 더 일찍부터 추진해온 쪽에서는 '거저먹고 들어가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계산 또한 없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공짜는 없는 모양이다. 국내 민주화와 남북관계 개선은 긴밀히 엉켜 있어 분단체제 극복의 경륜 없이는 그중 어느 하나도 실현되기 어렵다는 분단체제론 및 2013년체제론의 명제가 지난 1년의 경험을 통해 또 한번 쓰라린 확인과정을 거친 것이다. 게다가 국가정보원과 국방부의 대대적인 선거개입이 밝혀지면서 헌정질서에 대한 국민의 자존심에도 깊은 상처를 주었으며, 진상규명과 사법적 정의 실현을 방해하는 정부라면 당장에라도 퇴진해 마땅하다는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결국 믿을 것은 더 나은 삶을 열망하는 시민들 자신의 노력뿐인 것이다.

 

지금은 유신 2기도 망국전야도 아닌 시대전환기

 

그런데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 명확한 답을 찾기 전에 2013년체제 만들기의 실패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는 일이 우선이지 싶다. 아무리 국가기관의 불법·불공정 행위가 판을 쳤다 해도 87년 이래 국민들이 만들어낸 선거공간은 정권교체가 가능한 만큼은 열려 있었음을 겸허하게 시인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민주당 후보가 얻은 48% 득표율의 주된 교훈도 바로 그것 아닐까. 조금만 더 잘했으면 온갖 부정을 뚫고 승리할 수 있는 선거였는데도 야당들과 '진보개혁진영'은 정권교체와 2013년체제 건설의 적임자로서 국민의 신임을 받아내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실패의 결과로 우리 사회가 유신시대로 회귀했다고 단정하는 것도 올바른 배움의 자세가 아니다. 유신시대를 그리워하는 인사들이 청와대 안팎에 대거 포진하여 독재회복을 도모하는 사태는 개탄해 마땅하지만, 그들이 마치 유신회귀를 달성했거나 달성할 수 있다는 듯이 보는 것은 대한민국의 실상과 동떨어진 인식이며 그간 우리가 이룩해온 성취를 너무 얕잡아보는 자세다. 지금은 유신 2기도 아니고 일부 보수논객이 우려하는 구한말식 '망국'의 전야도 아니며, 단지 이미 수명을 다한 87년체제를 제때에 극복하지 못해 겪고 있는 극심한 혼란기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이처럼 지체된 시대전환의 담당자로서 실력을 쌓고 국민의 신뢰를 얻을 때다. 또한 지금은 세계화의 시대요 지역연대의 시대니만큼 국제사회로부터도 최소한의 인정을 받아내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일지는 사회통합 문제를 놓고 봐도 실감나는 바 있다. 곧, 한편으로는 남북대결과 국내의 이념대결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세력과 싸워서 이길 전투력이 필수적인데, 다른 한편으로 싸우기만 하고 선거에서 이길 생각만 하는 집단이 아니라 통합을 능히 이룩할 세력임을 미리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비교적 폭넓은 사회통합이 이 땅에서도 가능하다는 확신이 서야 한다. 이는 분단시대의 한국이 북한과의 대결상태를 유지하거나 반대로 북한의 존재를 망각한 채로 남한만이 잘살 수 있다는 헛된 꿈을 청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북의 점진적·단계적 재통합으로 분단체제 전체가 변혁되는 과정과 결합된 한국의 민주개혁과 민중생활 향상이 목표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광범위한 세력의 연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물론 국민 100%의 동의와 동참을 얻어내는 연대가 아니다. 그러나 부패한 극우세력과 진보를 자칭하는 각종 단순논리를 배제한다는 의미로 '중도주의적' 연대이며, 그러한 중도주의에 공감하는 국민들이 하나의 정당이나 조직으로 일심동체(一心同體)를 이루기보다 다체동심(多體同心)에 해당하는 느슨한 연대일 것이다. 나는 그러한 연대의 이념을 '변혁적 중도주의'라 일컬은 바 있는데, 이것이 현실정치의 구호가 되기는 힘들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때 '2013년체제'를 제창한 것도 그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 구호가 과거지사가 된 현실에서 변혁적 중도주의의 새로운 '보급판'을 개발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의 하나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변혁적이면서도 중도적인, 논리적 '형용모순'이랄 수도 있는 이 작업은 각자가 지금부터 시작할 일이다. 아니, 개념을 명시적으로 공유하지 않았을 뿐 그러한 흐름이 우리 사회에 이미 자리잡아가는 중이라고 본다. 변혁적 중도주의에 어긋나는 극단적 이념은 좌든 우든 그 설득력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으며, '안녕들 하십니까' 문답이나 심지어 최근의 노동자파업까지도 한편으로 이념보다 생활에 밀착된 정치를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회 곳곳에 분산되어 벌어지는 생활현장의 실험과 싸움을 연결시켜줄 다른 차원의 이념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대목은 2016년 총선이나 2017년 대선에서, 그리고 당장 새해에 닥칠 전국적 지방선거에서 수구세력을 꺾을 현실적인 방안이 잘 안 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선거중독증은 원칙적으로 경계할 일이려니와, 2014년 지방선거는 2010년에 북풍을 일으켜가며 온갖 무리한 공약을 밀어붙이려던 이명박정권을 견제해야 할 때처럼 절박한 선택이 아니다. 박근혜 후보가 내걸었던 전향적 정책공약들이 야권의 지방선거 승리로 되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하고, 여당의 승리로 박근혜정부의 실행력이 유신정권 수준으로 올라갈 리도 만무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선거공간의 소중함을 늘상 유념하면서도 변혁적 중도주의 세력의 성장을 위해 각자가 할 일을 차분히 진행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엠비' 5년을 겪은 것이 우리들 마음속에 아마도 '작은 엠비' 하나씩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가능해진 사태였듯이, 진정한 사회통합을 설계하면서 그 실현을 위한 싸움을 준비하며 지금부터 수행하는 시민 하나하나의 일상적 노력이 곧 시대전환의 길을 열고 세력과 인물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는다.

 

아무튼 2013년 말의 때이른 대혼란에서 나는 도리어 '100% 대한민국'이라는 무리한 기획에 결코 순응하지 않는 우리 국민의 변함없는 저력을 감지하며 희망을 느낀다. 안녕들 못한 가운데서도 우리 모두가 스스로 안녕을 찾아내는 2014년이 되기를 기원한다.

 

2013.12.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