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김현우 『정의로운 전환』
적색 없이 녹색은 가능하지 않다: 생산의 민주적 통제를 위하여
- 김현우 『정의로운 전환: 21세기 노동해방과 녹색전환을 위한 적록동맹 프로젝트』, 나름북스 2014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논의들은 대체로 현재 인류 전체가 처한 전대미문의 위기상황을 강조하는 것으로 말머리를 삼는 경향이 있다. 탄소연료는 곧 고갈될 예정이며, 오존층에는 구멍이 뚫리고, 지난 몇십년간 해수면이 얼마나 많이 올라갔으며, 전에 볼 수 없었던 여름철 더위와 겨울의 한파를 겪고 있음을, 또 북극곰은 얼마나 불쌍한 처지에 놓였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명명백백한 환경위기에 무감각한 대중을 질타하곤 한다. 다른 문제는 몰라도 환경문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대처해야 할 의제이므로, 계급정치에 무관한 중산층을 끌어들여서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기에 좋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그런데 종말이 곧 오리니 어서 정신을 차리고 새 삶을 찾으라는 외침이 거듭되어도, 먹고살기에 바쁜 대중은 가끔 불안해하면서 북극곰의 처지는 동정할지언정, 환경위기와 관련하여 자신이 발딛고 선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실천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환경, 인류 공통의 초정치적인 문제?
그러나 이를 단지 몽매한 대중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일단 인류 공통의 문제라고 하지만 지금 세계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층과 노골적으로 환경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상황에서 인류의 문제로 돌리는 데 대한 거부감도 있고, 그보다 당장 급한 일이 더 많은 듯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말이 좋아 인류 공통의 문제이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란 결국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피할 길이 없는데, 인류 타령을 하는 것이 듣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해결의 주체를 사라지게 한다. 그런 점에서 환경문제를 자꾸 인류 공통의 의제라고 하는 것은 통념과는 달리 비정치적이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책임소재를 가리고 실질적 해결을 모색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정치적 주체가 형성되지 않다보니 결국 힘을 얻는 것은 관료와 기득권층일 뿐이라는 점도 문제다. 또한 지난 세기 온도상승 추계가 어떠하니, 온실가스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얼마니, 또 그러한 계산은 과학적으로 신빙성이 있네 없네 하는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다보니 기술적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이야 이렇게 복잡하고 추상적인 문제는 결국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사안이라 생각한들 탓하기도 어렵다.
노동과 환경, 적록동맹을 꿈꾸다
『정의로운 전환』은 바로 이러한 주류적 담론지형에 문제제기를 하는 책이다. 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이자 한국노동사회연구소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활동하면서 계급과 사회운동, 도시정치, 대중교통, 거버넌스의 민주화 등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 김현우는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개입과 통제가 필요하며, 노동해방을 위해서도 생태적 고려가 필수라는 의미에서 적(노동운동)과 녹(환경운동)의 동맹을 주장한다. ‘노동해방’ 자체가 애초에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노동자가 해방된다는 의미와 자본주의적 임노동 및 불필요한 생산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를 모두 담고 있으므로 노동해방과 녹색전환 사이에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적록동맹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단지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만나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 무엇이 노동해방이고 누구와 어떻게 자본주의를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풀어가고자 한다.
‘정의로운 전환’
이 책은 용산참사부터 태백·정선의 폐광, 밀양 송전탑 문제와 원자력발전소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논의의 추상 수준에서도 직접적인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글에서부터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는 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원의 글들이 혼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담긴 다양한 인물이나 사건을 하나로 묶어주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라는 개념과 그에 담긴 문제의식이다. ‘이 개념은 어떤 지역이나 업종에서 급속한 산업구조 전환이 일어나게 될 때 그 과정과 결과가 모두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으로서, 주로 기후변화와 화석에너지 위기에 따른 산업의 녹색전환 필요성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논의와 사업으로 전개되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노총(ITUC)을 비롯해 세계 여러 노동조합이 채택한 정책이며, 한국에서도 2008년 이후 논의되기 시작한 개념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며 앞날 역시 순탄하다고만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정의로운 전환’ 개념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구자는 미국의 노동·환경 동맹의 선구자로 ‘작업장의 레이첼 카슨’이라 불렸던 토니 마조치(Tony Mazzocchi, 1926~2002)다. 그는 1950년대 노동조합운동의 조직화를 이끌면서 여성의 동일임금과 동일 건강보험을 단체교섭으로 다루었으며, 1960년대에는 독성 화학물질이 토양에 해를 미친다는 레이첼 카슨의 글을 읽고 제조업 작업장에서 유독물질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의 건강권에 주목하면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만날 필요성을 깨달았다. 마조치는 어떤 제품의 공정과 생산원료, 생산제품 모두가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유해한 것이라면 이는 지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과학자와 보건단체, 노동조합과 지역사회를 연결하여 암을 유발하는 석면 사용 제재 캠페인을 벌였고, 또한 지구온난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최초의 노동운동가로서 이미 1988년에 지구온난화에 대한 최초의 미국 노동조합 회의를 조직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몇몇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마조치가 했던 활동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를 ‘정의로운 전환’으로 개념화해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염이 이루어지고 나서 대처하기 이전에 오염 자체를 만들어내지 않는 생산을 추구해야 함을 주장했으며, 환경에 위협이 되고 기후변화를 가속화하는 업종을 대신해 친환경적 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안을 모색해왔다. 무엇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나게 되는 산업환경의 변화로 노동자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정의로운 전환’을 외치는 활동가들의 주장이며, 이를 위해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산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
이렇게 볼 때 ‘정의로운 전환’은 대체로 유해하거나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산업과 공정을 친환경적인 것으로 전환하도록 하면서,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경제적·사회적 희생이나 지역사회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훈련과 재정적 지원을 보장한다는 원칙,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일련의 정책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로운 전환’은 활동현장에서 활동가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용어이며, 여전히 살아서 진화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모호한 구석도 있다. 전환과정의 정치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노동자의 입장에서 정의를 촉구하면서도, 각 현장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자체가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로운 전환’ 개념이 가진 잠재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여기서 내세우는 정의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환경운동과 관련하여 정의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를 구분해볼 수 있다. 분배적 정의란 생산으로 인해 발생한 이득이나 해악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환경오염이나 독성피해,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 등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피해는 어떤 쪽에 집중되고, 그에 대처하는 비용은 누가, 어떻게 분담할 것이냐 등의 문제가 분배적 정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생산적 정의는 결국 이러한 이득이나 해악을 만들어내는 생산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각이다. 결국 이윤을 목적으로 생태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와 소비와 편리만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환경문제가 끝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환경문제는 다른 모든 사회문제와 마찬가지로 계급적인 성격이 있기에 인류 공통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대처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녹색일자리를 창출한다든가 참신한 정책적 제안을 내세워서 이룰 수 있는 과업도 아니며, 생산력 자체를 문제 삼고 생산과정 자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심지어 한번 열심히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정이라는 사실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정의로운 전환’의 문제에서 생산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전자의 문제를 더 부각시킨 이유는 결국 환경적 위험을 생산해내는 생산의 체제, 그리고 생태를 위협하는 생산력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 녹색주의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현실에서 너무 쉽게 간과되기 때문이다. 환경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단지 지금 지구가 위협에 처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구적인 차원에서 환경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차피 누구나가 다 똑같이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이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또한 종말론을 내세우다보면 결국 과학적 근거를 둘러싼 논쟁으로 빠져들기 일쑤이고 오히려 당장 급한 문제의 해결조차 논의의 장에서 밀려나곤 한다. 지구가 종말을 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에 존재하는 생산과 분배 과정의 부정의만으로도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과 소비지향적 생활방식이 변혁되어야 할 근거는 차고 넘친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한 영남 건설노조를 기억하며
그렇다고 해서 ‘정의로운 전환’의 문제가 먼 훗날의 이상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 책은 앞서 말한 마조치 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의 잭 먼데이나 원진레이온 진상조사에도 앞장섰던 김말룡 등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애써왔다고 할 수 있는 선구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산업과 태백·정선의 폐광 사례 등을 통해 설득해간다. 에너지협동조합이나 녹색교통, 녹색일자리 등 최근 우리에게 낯익은 주제들에 대해서도 ‘정의로운 전환’의 관점에서 다시 보게 해주는 이 책은 얇고 어렵지 않게 읽히지만 풍부한 이야기와 깊은 문제의식 덕분에 짧게 느껴지지 않는다. 추천의 글을 쓴 한재각은 쌍용자동차 싸움이 낯설어진 이유를 털어놓기도 하고, 현장에서 환경운동과 녹색운동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은 이 책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책은 대체로 왜 녹색의 시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노동운동에 중요한가에 대해서 설득하면서,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입장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한 설득은 상당부분 성공적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유용성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때로는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주장에 담긴 급진성이 훼손되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다. 결국 적록동맹은 적색에게도 필요한 것이지만 ‘정의로운 전환’의 역사는 녹색 역시 적색을 빼고는 근본적인 변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녹색과 적색의 연대가 늘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지만 밀양 송전탑 건설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영남 건설노조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현실에 없는 꿈만도 아니며, 노동현장과 지역사회에서 유해물질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자와 활동가들은 실제로 현장에서 작은 변화들을 축적해가고 있다. 그러므로 적록동맹과 생산의 민주적 통제는 당장 지금 여기에서 이뤄가야 할 숙제이지 현실을 모르는 자의 꿈이 아니다.
백영경 /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문화인류학
2014.11.1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