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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정권의 행보와 일어서는 일본 시민사회

남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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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0일 오후 일본에서 안보법안 강행처리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전개되어 한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전쟁을 반대하고 헌법 제9조를 수호하는 총궐기행동실행위원회’가 주도한 이날 시위는 일본 전국 200여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었으며, 토오꾜오 도심의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열린 집회에는 주최측 주장으로 12만명이 참가해서 안보법안 반대 시위로는 최대 규모를 이루었다. 경찰당국이 추산하는 3만 3천명만으로도 상당한 규모의 인원이 모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정도 규모의 시위가 전개된 것은 지난 5월 3일 요꼬하마의 해변공원에서 열린 5.3헌법집회 이래의 일이었다.

 

전후 70년의 ‘헌법의 날’을 기념하여 열린 5.3헌법집회는 올해 1월 실행위원회가 만들어져 기획했고, 이를 계기로 탄생한 여러 단체가 이번 8월 30일의 집회에 결집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실즈(SEALDs, 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긴급 행동)라는 학생들의 조직이 주목을 받았으며, 이에 호응하여 6월에는 ‘학자들의 모임’이, 7월에는 ‘엄마들의 모임’이 만들어져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8월 3일에는 젊은이들의 거리인 토오꾜오 중심 시부야(渋谷)에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시위대가 나타나기도 했다.

 

안보법안, 아베의 강행과 국민의 저항

 

안보법안에 대한 일본 국민의 저항감은 몇차례에 걸친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7월초에 실시된 요미우리신문의 조사에서 찬성이 36%, 반대가 50%로 그 차이가 상대적으로 좁게 나타나긴 했지만, 6월말에서 7월에 실시된 쿄오도오통신, 마이니찌신문, 아사히신문, NHK의 여론조사에서는 법안 찬성이 25~30%인 데 반해 법안 반대는 50~60%로 나타났다. 6월말에 실시된 산께이신문의 조사에서 찬성이 49%로 44%의 반대를 약간 웃돌아 예외적 현상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총체적으로 일본 국민은 안보법안의 채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베 내각은 안보법안을 밀어붙일 태세다. 안보법안은 새로운 법안 1개와 10개 개정안 등 11개의 법률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골자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고 자위대의 활동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특히 자위대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여 외국에서 외국군과 함께 무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존립위기사태’의 규정이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주변사태법을 중요영향사태법으로 개정해, 전에는 자위대의 후방지원 활동범위를 일본의 ‘주변’으로 한정했던 것과 달리 일본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사태로 판단하기만 하면 그 범위를 지구적 규모로 무한 확대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아베 내각은 9월 16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이들 법안을 상정하여 처리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 자민당 총재 선거도 이에 맞춰 아베의 ‘무투표 당선’을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썼다고 하는 후문이다. 선거에 돌입할 경우 9월 20일의 총재 선거일을 사이에 두고 참의원에서의 가결이 불투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9월 8일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무투표로 아베 총재의 연임이 결정되자 정부-여당은 곧바로 참의원에서의 9월 16일 강행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 쪽에서도 대결전의 태세로 나서고 있다. 위에 언급한 ‘총궐기행동실행위원회’는 전쟁법안 반대, 아베 내각 퇴진을 위한 9월 9일 히비야공원 대집회를 ‘태풍과 집중호우’가 예상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강행하기로 결정했으며, 이후 11일부터는 연일 국회 앞에서 연좌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계획해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향후 일주일간 일본 전후사의 최대 고비를 맞이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형세에 따라서는 아베 신조오 총리의 외조부인 키시 노부스께를 수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60년 안보투쟁을 방불케 할 수도 있다. 사실 안보투쟁을 방불케 하는 시민들의 궐기는 이미 3년 전에 한번 분출된 적이 있다.

 

고개 드는 일본인의 ‘생활평화주의’

 

2011년 3.11대지진의 여파로 후꾸시마원전이 폭발하고 원자로 노심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목도했던 일본의 시민들은 2012년 여름 오오이(大飯)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는 집회를 통해 일어서기 시작했다. 원자로 노심의 용융을 배경으로 시민사회가 융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2012년 6월 29일의 국회의사당 집회에서 20만명이, 7월 16일의 ‘사요나라 원전’ 요요기공원 집회에서 17만명이 운집해서 원전반대의 대합창을 일궈냈던 적이 있다. 민주당 정권의 붕괴는 사실 이 원전반대 집회로 인한 치명상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융기는 더욱 커다란 적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원전 재가동의 배경에 미일동맹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전’은 ‘기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때마침 중국과 일본의 국력 역전이 일어나 ‘중국위협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중국위협론을 배경으로 아베 총리가 되돌아왔고, 그와 함께 미일동맹이 되돌아왔다. 아베노믹스의 구호하에 ‘원전’이 살아남았고, 적극적 평화주의의 구호하에 ‘기지’가 살아남았다. 김정일 사후 한반도에서는 연일 긴장이 고조되어 한반도 ‘휴전체제’는 민낯을 드러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기지국가’ 일본의 속성은 더욱 강화되어 미일동맹으로의 귀속을 강화시켰다.

 

이에 호응하는 것이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 용인이었고, 이를 법제화하는 것이 안보법안이다. 안보법안이 통과되면 ‘자위대’는 지구화한 미일동맹의 단절(切れ目)을 메우기 위해 지구 어디에든 출동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슬람국가(IS)가 펼쳐놓은 전선에서 지구적 규모로 일상화된 분쟁의 본질을 일본 국민은 감지하고 있다. 이에 반응하여 일본 국민의 심성에 자리잡은 ‘생활평화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좀처럼 강력한 변수로 부상하지 않지만 생활의 세계에 침투해서 굳건한 상수로 존재하는 평화주의로서 일본의 ‘생활평화주의’가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행동에서 어떻게 발현될지 주목해볼 만하다.

 

 

남기정 / 서울 대 일본연구소 교수

2015.9.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