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이성복 『무한화서』 『불화하는 말들』 『극지의 시』
타락의 변증법
―이성복 『무한화서』 『불화하는 말들』 『극지의 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언어는 타락했고 그와 더불어 우리의 언어경험 또한 심각하게 훼손되어버렸다. 손쉬운 해고와 같은 제도적 폭력이 ‘노동개혁’이라고 선전되고,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노동착취가 ‘열정페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며, 최저생계비로 차린 식탁이 “황제의 생활”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이 말들이 타락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 말들이 진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은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단지 그런 의미에서라면 언어의 타락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모든 인간의 언어가 근원적으로 타락한 언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한 매개(media)이고, 사물을 왜곡함으로써 사물을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역설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노동개혁’과 같은 프로파간다를 두고 언어의 타락을 따로 이야기하는 까닭은, 그 말이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하면서도 바로 자신이 왜곡과 은폐에 기초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다는 점에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내뱉는 말이 자신이 행한 인위적인 조작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자는 그 말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짊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 말들은 타락한 만큼 무책임하고 무책임한 만큼 순진무구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가 타락한 언어의 시대라면, 우리는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순진무구한 언어에 둘러싸인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詩)의 폭력과 시인의 슬픔
그렇다면 우리는 언어의 타락에 맞서서 올바른 언어규범이나 언어의 상징성을 되찾고자 애써야 하는 것일까? 혹은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오히려 정반대로 무언가를 회복하려고 하기에 앞서, 저들에게서 또 우리 자신에게서 언어를 박탈하거나 파괴하는 작업이 먼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시를 읽고 시인의 말을 가까이 두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다. 시인은 언어를 순수한 상징으로 탈바꿈시키거나 말의 진정성을 회복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우리가 망각과 무책임 속에 사용하는 언어들을 우리에게서 박탈하고 파괴하는 폭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세권으로 묶여 나온 이성복의 시론집(문학과지성사 2015)은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 시인 자신이 끊임없이 반복해온 자기 다짐의 흔적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시는 사물과 세계를 직접 겨냥하는 형식이 아니다. 우리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언어가 만들어낸 “사물에 대한 관념”을 마주한 채 살아가며, 시의 언어가 겨냥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시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주조한 “언어를 변형하고 굴절시킴으로써, 관념에 싸여 있는 사물을 구해내”(『무한화서』 64면)려고 한다. 말하자면 시는 세계와 사물을 재단하는 언어의 왜곡과 폭력에 대한 또다른 폭력인 셈이다.
그렇게 사물에 대한 기존의 언어와 관념이 시의 폭력에 의해 부서져나간 자리는 평소에 눈에 띄지 않았거나 잊혀져버린 채 남아 있던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 그것은 결코 대단하거나 그럴듯하지 않다. 이를테면 그것은 “개 오줌 지린내”를 맡으며 느끼는 “슬픔” 같은 것이다. 이성복에게 “개 오줌 지린내”는 단순한 악취가 아니라 “사람 오줌 냄새와 같기 때문”에 인간의 비루한 육체와 초라한 삶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엇이다. 그래서 그에게 “개 오줌 지린내”는 메타포가 된다. 이 메타포는 네발짐승의 분비물과 인간의 생리작용 사이에 애써 만들어낸 구별을 부수어버림으로써, 즉 폭력의 형식이 됨으로써 우리가 단 한순간도 떨쳐내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잊고 살아가는 짐승과 다름없는 삶의 초라한 모습들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그것들은 머지않아 다시 잊혀지거나 은폐되거나 내버려지지만, 시인의 “슬픔”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을” “잊을 수 없고, 잊지 못했다는 증거”(『무한화서』 51면)로서 남는다.
문학 혹은 타락의 변증법
“문학은 인생이라는 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꾸는 또다른 꿈이에요. 이 꿈 또한 인생이라는 꿈과 마찬가지로 결코 희망적이지 않아요. 현실이라는 꿈속에서, 현실이라는 꿈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참담한 꿈을 가설함으로써, 잠든 우리를 깨어나게 하려는 게 문학 아니겠어요? (…) 저는 이것이 현실을 풍자하거나 계몽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문학의 기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그런데 정말 문학이라는 ‘맞불’이 인생의 ‘화마’를 잡을 수 있을까요. 전 믿을 수가 없어요.”(『극지의 시』 85면)
위에서 이성복이 말하고 있는 문학론/시론을 언어의 타락이라는 문맥으로 옮겨보자면, 문학 혹은 시라는 언어형식은 타락한 언어 앞에 올바른 언어, 정상적인 언어를 마주세우는 대신에 더욱더 타락한 언어를 가지고 맞서는 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언어의 타락―즉 현실을 왜곡하는 언어의 폭력을 극한에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의 타락상을 폭로하고 우리를 각성시키는 “맞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각성이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문학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삶과 죽음을 견뎌내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가공의 내러티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삶과 죽음에 관한 “가공의 내러티브” 바깥에서 ‘진짜 현실’이나 ‘더 나은 삶’을 찾는 손쉽고 달콤한 상상으로부터도 깨어나도록 한다.
언어의 타락이라는 사태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이중의 각성과 변증법적인 시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타락한 언어들을 타락한 것으로서 인식하고 거기에 물들여진 끔찍한 왜곡과 망각 그리고 무책임에서 벗어나야 하는 동시에, 언어의 타락이라는 사태 외부에서 투명하고 순수한 언어, 상식만으로 이루어진 언어를 손쉽게 ‘상상’해서도 안된다. 그와는 반대로 언어의 타락이라는 사태를 언어의 공공연한 비밀―즉,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하고 뒤죽박죽의 “잡탕밥”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지평으로서 바라볼 때만이, 자기기만과 망각, 무책임으로부터, 참기 힘든 순진무구함으로부터 언어와 삶을 구해낼 수 있는 실낱 같은 기회가 간신히 허락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수림 / 문학평론가
2015.9.3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