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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페터 피셔 『과학한다는 것』

두 문화, 그 사이의 비대칭적인 벽 너머를 엿보기
-에른스트 페터 피셔 『과학한다는 것』

 

 

rheerh인간은 합리적인가? “합리적이고자 하지만 완전히 합리적일 수는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될 수 있는 한 합리적이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가 사실에 가까운 답일 것이다. 이 노력은 자기완성을 향한 노력이자 동시에 자기부정을 향한 노력이므로, 인간을 고양시키는 동시에 괴롭히기도 한다. 합리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가장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여 성공적으로 쌓여 올라간 것이 근대 학문의 세계다. 그 가운데서도 자연과학은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합리성을 극단까지 추구한 나머지 새로운 언어(수학)와 새로운 세계관까지 만들어가면서 인간이 창조해낸 지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쌓아올린 과학이라는 지식과 실천 체계의 위대함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힘이 점점 커지고 그 체계가 점점 복잡해지는 만큼 거기서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이 책 『과학한다는 것』(김재영 외 옮김, 반니 2015)에서 지은이 에른스트 페터 피셔(Ernst Peter Fischer)가 갈파했듯이 “물리적 법칙의 문제점은 이 법칙이 대중이 즐겨 쓰지 않는 언어를 써야 가장 정확하게 표현된다는 것”이므로, 과학이 정교하게 발달하면 할수록 일상의 언어와 경험으로부터는 더 멀어진다. 과학의 언어와 사유방식에 능통하지 않은 이들은 과학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손 놓고 구경하다가, 나중에 그것이 초래한 삶의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될 때는 무력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과학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이른바 ‘두 문화(Two Cultures)’와 같은 이야기들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존 스노우가 1959년 케임브리지 강연에서 “두 문화”라는 말을 만들어서 쓴 것은, 당시 영국의 인문계 엘리트가 자신들이 향유해온 “그 문화(The Culture)”, 즉 문학과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계 문화에 만족한 채 과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책의 원제인 “또 하나의 교양"(die andere Bildung)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독일 인문주의를 대표할 수 있는 낱말 중 하나인 ‘교양(Bildung)’에 견주어, 과학이 그만큼 중요하고 인문교양을 쌓은 사람들도 과학을 또 하나의 교양으로서 알아야 한다는 지은이의 호소를 담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과학에 적대적이거나 과학을 어려워하고 피하는 이들을(사실 현실에서 이 둘은 자주 겹친다) 과학의 세계로 초대하고자 한다. 그 방편은 과학사와 과학철학이다. 서양 근대과학이 걸어온 길을 따라오면서, 중요한 사건들의 역사적 배경과 철학적 함의를 되짚어보자는 것이다. 그 논의가 매우 자세하고 다루는 주제가 방대하여 결국 500쪽이 넘어가는데, 그 내용을 여기에 다 요약하기는 어렵다. 내용이 많아서라기보다도 낱낱의 과학사적 사건들은 정작 이 책에서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과학사적 사건들 자체라기보다는, 말하자면 두 문화의 분리에 대한 계보학이라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래 근대과학이 태동하고 각각의 분야들이 분화·발전해 나가면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지적·물질적 힘을 얻은 한편 일상세계의 살아 있는 자연으로부터는 멀어진 듯한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되짚어가면서, 지은이는 근대 초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사람들은 이 괴리감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했는지 질문하고, 우리는 어떻게 이 괴리감에 대응할 것인지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이런 식의 접근, 즉 과학사를 통해 과학지식의 발전과정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과학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는 시도는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대부분의 교양과학사 책이 사실은 이런 접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은이는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 독특한 태도를 보여준다. 바로 과학을 어려워하거나 싫어하는 이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자세다. 책의 앞부분에서 지은이는 과학이 세상을 보는 하나의 ‘창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과학의 필요와 효용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에 접근하려는 이들의 부담을 줄여주고자 손을 내미는 태도로도 읽힌다. 이런 태도는 그가 “인간의 특징은 가슴 속에 두가지 영혼이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하며, 인간을 분할할 수 없는 ‘개인(Individuum)’이 아니라 ‘분할체(Dividuum)’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인간은 이성만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며, 과학을 낯설어하고 피하려 하는 인간의 얼굴은 과학지식의 탐구를 추동하는 인간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다면성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학한다는 것』은 다른 교양과학 입문서와 구별되는 따스함을 지니고 있다.

 

교양으로서의 과학, 그렇다면 인문-문화는?

 

그 연장선상에서, 지은이는 교양있는 보통 사람이 교양으로서 과학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과학을 하나의 ‘예술’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근대과학은 인문주의자에게 “어떻게 과학에서 나타나는 이해의 세계와 예술에서 표출되는 체험의 세계를 하나밖에 없는 내 머릿속에서 합일할 수 있는가”라는 과제를 던졌는데,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예술을 과학에 종속시킬 것이 아니라 거꾸로 과학을 자연 세계에 대한 ‘그림(Bild)’을 제시해주는 하나의 예술로 보자는 것이다. 자연법칙은 “그것에 대해 더 질문해서는 안되는 확답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을 조망하는 데 필요한 제안”이며, 우리는 과학에 대해 거리감을 갖는 스스로를 책망할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는 이성적 존재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비이성적”이고,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문화의 창조적 형성에는 과학 하는 인간과 문학 하는 인간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노우가 “두 문화”를 처음 이야기했을 때에는 과학이 인문문화의 큰 성채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웅변하는 형국이었지만, 오늘날 과학지식의 양과 범위를 생각하면 두 문화 사이의 장벽은 오히려 인문학에서 자연과학으로 넘어가고자 할 때 훨씬 높고 험하게 느껴진다. 얇지도 쉽지도 않은 책이지만, 지은이의 유연함 덕분에 이 책은 과학의 세계에 호기심을 품어왔으나 쉽사리 그곳으로 탐험을 떠나지 못했던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다.

 

다만 한국의 현실에서 한가지 질문이 뇌리에 남는다. 우리에게 “두 문화” 또는 “또 하나의 교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전제가 되는, “그 문화” 또는 “그 교양”은 존재하는가? 만일 여기에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김태호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2015.11.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