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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시간, 세상의 풍경: 허우 샤오시엔 이야기

정홍수

정홍수

11월 12일부터 서울의 두 극장에서 이어진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侯孝賢, 1947∼)의 전작전(全作展)이 11월 29일 끝났다(부산 영화의전당은 12월 3일까지). 2003년 안국동 선재아트센터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전작전이 열렸으니, 13년 만이다. 이번 전작전 프로그램 속에는 감독의 신작 「자객 섭은낭」(2015)도 들어 있었다. 완성까지 10년이 걸린 영화.

 

마음은 바빴지만, 정작 네편밖에 보지 못했다. 어수선한 생업에 쫓겨 극장으로 달려갈 시간을 많이는 내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에 대한 온당한 대접이자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의 영화는 언제든 삶과 생활이 먼저다. 고달프고 막막하지만 누구든 담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의 시간이 그의 영화에는 흐르고 또 흐른다.

 

영화 속 시간을 함께 살아내게 하는 감독

 

대륙에서 습기 많은 대만 남쪽으로 건너와야 했던 아버지는 천식으로 고생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당신이 남긴 일기를 읽던 딸은 울음을 터뜨린다. 아버지가 아끼던 대나무 의자며 값싼 책상. 그이가 제대로 된 가구들을 장만하지 않은 것은 금방이라도 중국 본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손자 아효를 데리고 자꾸 동구 밖으로 나간다. 그건 저 대륙의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머니도 세상을 떠나지만, 소년 아효는 자란다. 패싸움을 하고, 동네 소녀를 사랑하며. 우리의 지난 시대 못지않은 혹독한 반공독재의 대만 현대사가 소년들의 시간을 억누르지만, 소년들은 때로는 관공서 유리창을 향해 돌을 던지며 자라난다. 그것은 자신들의 시간을 차압하려는 세상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항의였을 테다. 잠든 줄 알았던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할머니가 누워 있던 다다미 자리에는 진물과 함께 벌레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질책하듯 쳐다보던 장의사의 눈길을 어떻게 잊을 것인가. 그 부끄러움을. 그해 아효는 대학입시에 실패한다. 소녀에 대한 사랑은 마음속에 묻어두어야 했으리라. 「동년왕사(童年往事」(1985)의 영어 제목은 ‘The Time to Live and the Time to Die’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감독은 마을 동구의 나무, 비, 골목, 집, 바람이 이루는 세상의 무심한 풍경, 그 시간 속에서 자신만이 찾아낸 슬프지만 담담한 카메라의 거리(距離)를 통해 보여준다. 진부한 비유를 동원하자면, 그 ‘거리’에는 소설과 시를 함께 가능케 하는 힘이 얼마간 있는 듯하다. 그때 우리네 삶은 마치 꼭 그러한 것처럼 거기 흘러간다. 감독은 우리가 그 영화의 시간을 살아내게 한다.

 

12년 전 감독의 전작전을 보았던 바로 그 극장에서 「펑쿠이에서 온 소년」(1983)을 다시 보았다. 펑쿠이라는 작은 섬에서 대만 남부의 큰 항구도시 가오슝으로 무작정 건너온 소년들. 7,80년대 시골에서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상경했던 우리의 모습이 거기 있다. 조금 널찍하긴 해도 구로공단 닭장집 같은 곳에 방을 구하고 도회지 생활을 시작한다. 누구는 공장으로 가고, 또 누구는 시장 행상으로 나선다. 주인공 아칭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긴 옆방의 샤오싱은 갑자기 타이페이로 떠난다. 거기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보겠다며. 그녀는 아칭에게 도장을 주며 이번달 월급을 대신 받아달라고 말한다. 나중에 연락할 테니 부쳐달라고. 그녀는 배를 타러 떠난 황진허의 연인이긴 해도 아칭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이런 잔인한 부탁이란 도대체 무언가. 그런데 왜 이 장면이 내 기억에서는 지워졌을까. 나는 영화를 처음 보는 것처럼 몸을 숙여야 했다. 인파 속 가오슝 터미널에 멍하게 홀로 서 있는 아칭을 영화는 오래 묵묵히 보여준다. 샤오싱을 태운 버스는 떠나고, 아칭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아름다운

 

근자에 ‘멍청한 무지’라는 표현을 접한 적이 있다. 기실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든, 세상에 대해서든 ‘멍청한 무지’에 둘러싸여 있다는 이야기. 왜 아니겠는가. 그때 믿음만이 그 무지의 틈을, 간극을 메울 수 있을 테다. 인간에 대한 믿음, 세상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터미널에 홀로 남은 아칭은 바로 그 무지 앞에 당도해 있는지도 모른다(조금은 더 영악해 보이는 샤오싱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얼마 전 아버지의 죽음을 겪기도 했다. 육친의 죽음이야말로 그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다. 그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영화의 다음 장면에서 아칭은 친구들이 테이프 행상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간다. 이들은 이제 며칠 있으면 군대에 가야 한다.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던 아칭은 벌떡 일어나 의자 위에 올라선다. “군입대 왕창 세일. 세개 오십원! 세개 오십원!” 처음엔 너무 싸다며 실랑이하던 친구들도 다 함께 나선다. “세개 오십원! 세개 오십원!” 소년들은 그렇게 세상 속으로 걸어가고,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항구를 오가는 배와 갈매기의 풍경만이 이들과 나란히 있다. 이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야기가 왜 그렇게 가슴을 치는가. 모르겠다.

 

아마도 ‘멍청한 무지’는 끝끝내 남을 것이다. 「비정성시」(1989)의 그 둥글고 큰 식탁은 가혹한 대만의 역사 속에서 하나둘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빈자리를 더하고, 「연연풍진」(1986)의 소년은 끝끝내 바닥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남국재견」(1996)의 두대의 오토바이는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리듬으로 산등성을 오르겠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이 탄 차는 논두렁에 처박힐 것이다. 「밀레니엄 맘보」(2001)의 신주꾸 철로변 여관에서 비키는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며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밀레니엄 맘보」가 메워질 수 없는 고독과 그리움의 이야기인 동시에, 미래가 닫혀버린 비키와 하오하오의 세대, 그 대책 없는 세대에 대한 장형(長兄)의 책임과 부끄러움, 근심과 사랑의 시선으로 찍은 영화라는 것을 이번에 다시 보며 알았다. 그러니까 “그건 십년 전인 2001년의 일이었다. 그해 유바리엔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2015년에 무협의 형식으로 도착한 「자객 섭은낭」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한 장면 한 장면이 최선이었다. 감독은 왜 영화의 마지막에 카메라를 벌판의 집 한켠에 있는 염소들 쪽으로 향한 것일까. 그 염소들의 눈을 잊을 수 없다. 대륙에서 찍었다는 자연, 그 아름다운 산하의 풍광들은 감독이 분단과 이산의 아픔을 겪은 아버지 세대에 바치는 헌사였던 것일까. 그러면서 그 산과 벌판, 하늘과 초목은 「연연풍진」과 「비정성시」의 그곳이기도 했다. 아니,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세상의 풍경이었다. 하나하나 다시 보고 싶다.

 

 

정홍수 / 문학평론가

2015.1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