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레나타 살레츨 『불안들』
불온한 불안을 꿈꾸며
-레나타 살레츨 『불안들』, 후마니타스 2015
80년대생인 나에게 90년대말의 외환위기는 마치 성장통과도 같았다. 속칭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사춘기의 격랑이 내면으로부터 불어오는 것인지 외부로부터 스며든 것인지 도대체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시대는 하 수상했고, 나를 비롯한 뭇 청춘들에게 내면의 통증은 시대의 통증으로 고스란히 상쇄되었다. IMF라는 세 음절의 기표로 정의되는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사회’라는 대타자의 결여와 ‘나’라는 주체의 결여가 마주친 순간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이한 마주침 이후 우리 모두가 일제히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거듭난 것처럼 보이는 게 단순히 착시는 아니리라고, 레나타 살레츨(Renata Salecl)의 『불안들』(On Anxiety, 2004, 한국어판 박광호 옮김)에서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다.
결여를 결여한 사회의 불안
두 결여가 마주침으로써 역설적으로 결여가 결여된 상태는 불안을 유발한다. 이 불안은 일반적인 불안과는 좀 다르다. 통상 불안이란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지 쉽게 말할 수 없는, “대상이 없는 두려운 상태”(44면)로 정의된다. 반면 오늘날의 불안은 결여의 자리에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 데서 유래한다. 어떤 대상? 바로 ‘결여’ 그 자체다. 주체의 결여에 대타자의 결여가 들어앉아 있다. 주체에게 요구하고 명령하는 대타자는 오늘날 한없이 쪼그라들어, 주체는 ‘선택의 범람’ 앞에 고통받는다. 흔히 ‘결정장애’로 자조되곤 하는 이 “자유의 독재”(tyranny of freedom)는 사회가 어떠한 지침도 제공해주지 않으면서 매 선택에 있어 최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것을 주체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끔찍한 파라다이스를 펼쳐놓는다.
사회가 제공하지 않는 부분은 상품으로 고스란히 대체되고, 주체는 이를 소비함으로써 끊임없이 더 나은 자아로 갱신되어야만 한다. 오늘날의 주체는 ‘존재하는(being)’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becoming)’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매뉴얼, 성공적인 연애를 위한 조언, 더 아름답고 날씬해지는 비법을 전수하는 기사와 동영상이 날로 넘쳐난다. 저 상품화된 목소리들은 양적으로도 압도적일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접근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로 위협적이다. 저 목소리들이 아무리 늘어나고 편재해도 가장 중요한 대타자의 요구는 결여되어 있으며, 만족을 찾을 수 있을지의 여부는 오로지 주체에게만 달려 있다는 데서 불안은 더해만 간다.
주체는 대타자를 갈구한다
대타자의 욕망이 주체에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는 2장에 언급된 전쟁 중의 사례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참전하는 군인들은 일개인으로서보다 군 집단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할 때 정신적 외상이나 죄책감을 덜 받는다. 집단에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는 환상 없이 개인의 투쟁으로서 전쟁을 경험했을 때 군인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한 증세를 보인다. 전쟁에 집단이 아닌 ‘개인주의’ 관념을 적용한 것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무렵부터라는 대목은 각별히 섬뜩하게 다가온다. 필요에 따라 단기간 전장에 배치되었다가 곧장 후방으로 전출되는 등 철저히 개인으로서 훈련받은 병사들은 ‘단기배치 증후군’ ‘교대불안’ ‘고독장애’ 등의 심리적 증상을 호소했다.
끔찍한 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주체는 실제로 일어난 적 없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전쟁영화에 출연하고 있다는 환상을 통해 자아가 붕괴되지 않도록 하거나, 원거리에서 이루어진 살인에 대한 기억을 왜곡하여 희생자가 죽기 직전 자신을 가까이서 응시했다고 믿으며 가상의 죄책감을 만들기도 한다. 살레츨이 주목했듯이 벤야민 월커머스키가 나치 수용소에서 보낸 끔찍한 어린 시절을 기록한 『편린들』은 아예 완전히 허구로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월커머스키는 상징적 권위의 역할을 맡는 데 실패한 아버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버지가 수용소에서 끔찍하게 처형된 것으로 기억을 다시 쓴다. 나아가 다시 쓴 기억을 회고록의 형태로 출간하는 것은 자신의 기억과 외상에 대해 들어줄 사람을 대타자로 상정하는 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자신이 겪은 외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억을 아예 새로 쓰는 이 ‘기억 회복 치료’의 심각성이 와닿지 않는다면 이 정부의 수장이 밀어붙이는 국정교과서 사업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환상에 함몰되지 않기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들려주려는 이 새로운 강박은 그렇게 할수록 자신의 불안이 줄어들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219면) 제아무리 모든 것을 다 말하려고 애써보아도 언제나 말해지지 않는 무언가가 이야기의 결여로 잠재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이다. 이야기의 은유와 허구는 상징적 질서의 비일관성을 덮어 가리는 환상으로서 기능한다. 오늘날 정념의 매체로 확고히 자리 잡은 종편 채널 속 보수적 패널들의 낯 뜨겁고 뻔뻔한 수사가 그러한 환상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보수세력이 꿈꾸는 한국사회에 대한 환상을 생산할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도 그 환상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그처럼 확신에 찬 궤변을 쏟아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환상은 대타자의 부재를 보충해주고 불안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해주는 게 분명해 보이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정신병으로 귀결된다. 2001년 텍사스에 사는 독실한 어머니 앤드리아 예이츠는 어느날 아침 다섯 아이를 욕조에 하나씩 빠뜨려 죽인 뒤 경찰에 자수한다. 그녀는 자신이 좋은 엄마가 아니라서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지 않았고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로서의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아이들이 지옥불에 타 죽기 전에 죽여준 거라고 침착하게 진술했다. 그녀는 종교적 믿음이라는 환상에 강고히 사로잡혀 있었고 올바른 일을 행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정신병 환자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며, 그가 믿는 환상은 결여를 모른다.
마찬가지로 정부라는 대타자의 목소리를 충실히 확대 재생산하는 매체의 논리를 고스란히 맹신하는 이들의 세계 또한 결여를 모른다. 이 책의 논리에 따르자면 그러한 태도는 일종의 정신병이다. 한편 그들이 만족하며 안주하는 이 세계의 심각한 균열을 볼 줄 아는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불안장애에 시달린다 해도 놀랍지 않은 오늘이다. 살레츨은 주체가 대타자의 존재 유무와 대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여전히 불안해하는 사회는 정신병화되지 않은 사회라고 결론을 갈음한다. 그가 인용한 한 미군 지휘관의 말에 따르면 “불안이 전혀 없는 병사를 볼 때 저는 정말로 조심하고 경계합니다.”(272면) 불안이 만연한 사회에 한번도 불안해본 적 없는 것 같은 저 위정자들을 우리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까닭이다. 이 사회의 결여를 응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들의 불안에 동참해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
이은지 / 문학평론가
2015.12.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