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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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신년칼럼] 신종 쿠데타가 진행중이라면

백낙청

백낙청

지금이 ‘신종 쿠데타 국면’이라는 주장이 『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머리말에서 제기되었다(이남주 「역사쿠데타가 아니라 신종 쿠데타 국면이다」). 이것이 상투적인 과장이 아니라면 ‘신종 쿠데타’가 무엇인지부터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진단의 적절성을 검증할 수 있고 올바른 처방을 낼 수 있다. 동시에 쿠데타를 막아내고 무얼 하겠다는 건지도 따져봐야 한다.

 

먼저 분명히 해둘 점은 ‘신종 쿠데타’론이 흔히 들먹여지는 ‘파시즘 부활’ 주장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 민주주의에 심각한 퇴행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것이 곧 1987년 이전 군사독재체제의 부활은 아니다. 이 점은 지난해 신년칼럼에서도 지적했는데(「광복 70주년, 다시 해방의 꿈을」, 창비주간논평 2014.12.30), 쿠데타가 ‘진행중’이라는 표현 자체가 하루아침에 총칼로 세상을 바꿔놓는 군사정변과는 다른 ‘신종’ 사태임을 말해준다. 이남주 교수는 이를 ‘저강도 쿠데타’ 또는 영어로는 한층 실감나는 'creeping coup d'état'(슬금슬금 기어들어오는 쿠데타)로 규정하기도 했다.

 

어떤 ‘신종’인가

 

대한민국은 휴전 이후 세번의 쿠데타를 경험했다. 그중에서 5·16이 일부 군인들의 반란에 의한 전형적 쿠데타였다면, ‘10월유신’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손수 헌정을 파괴한 친위쿠데타였고, 전두환 일파는 12·12로 먼저 군부를 장악한 뒤 이듬해 5·17 계엄확대로 일종의 ‘할부식’ 쿠데타를 완수했다. 현 시국은 그 어느 경우와도 달라서 군대출동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87년 이래의 민주화된 제도와 관행들을 전방위적으로 허물어가는 과정의 중심에 대통령 자신이 있다는 점에서 5·16이나 5·17보다는 10월유신을 닮았다고 하겠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이 보여주듯이 이 과정은 목표가 반시대적일뿐더러 절차가 불법·탈법적이고 ‘대한민국 대 반대한민국’ ‘통일을 대비하는 전국민의 사상무장’ 등 유신시대의 선전문구들을 총동원하고 있다. 당연히 ‘역사쿠데타’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그런데 교과서 문제에만 골몰하다보면, 이 정권이 한없이 어리석고 황당한 집단이라고 얕보기 쉽고, 설혹 국정화를 막지 못하더라도 ‘1년짜리’로 끝날 테니 잠시 버텨내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무능하고 무모한 면모가 엿보인다 해도 한국의 기득권세력이 정말 그토록 멍청한 집단인가. ‘1년짜리’ 여부도 다음 대통령선거 결과에 달린 것 아닌가.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박근혜 대통령 자신의 임기연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87년 6월항쟁의 최대 열매 가운데 하나인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최근 몇년간 착실히 축소되어왔다. 2012년 선거에서의 대대적인 관권개입과 불법행위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대부분 흐지부지되었고, 수사기관의 독립성, 관료조직의 중립성, 언론의 공정성 등 재발방지 장치들이 하나같이 멸종위기에 놓였다. 시민들이 집회와 시위를 통해 의사를 직접 표시할 기회는 극도로 억압되었다. 규정을 어긴 물대포 직사로 백남기씨가 사경을 헤매는데도 당국이 사과 한마디 않는 것은 반민주적 자세의 ‘결연함’을 과시하는 사례다. 여기에 언론장악과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 대학의 자율성과 교육자치에 대한 공격, 전문가집단들의 무기력화와 예속화, 각종 우익단체의 극렬행위에 대한 묵인 내지 방조를 더하면 교과서 국정화는 박근혜식 ‘시대교체’ 기획의 가장 표나는 일부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같은 전략가가 못 되기에 신종 쿠데타는 그 추진과정이 일사불란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비교해보면 4대강사업 같은 일에 한눈파는 일 없이 ‘100% 국민통합’과 ‘하극상 불용납’의 사회를 만드는 데에 독기에 가까운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음이 돋보인다. 그리고 대통령의 이런 지원을 받는 수구세력은 기나긴 세월을 통해 축적해온 체질화된 ‘노우하우’와 정권상실 10년의 원통함을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공유하고 있다. 최고위 전략가의 공백을 능히 감당할 형국이다.

 

87년체제 다음은?

 

그런데 성사되더라도 옛날 정변의 화끈한 효과를 못 거두는 것이 신종 쿠데타의 또다른 특징이다. 국민들의 각성을 피해가며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는’ 것이 그 속성이므로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건설’ ‘자유민주주의 수호’ 같은 거짓말을 끊임없이 해야 하고, 결국 제대로 복종하는 국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게다가 세계경제는 박정희시대와 달리 혁신과 창의를 중시하는 시대에 돌입했기에 상명하복 또는 면종복배가 체질화된 사회로는 한국경제의 추락을 막기가 어려워진다. 돌파구가 될 수 있는 남북의 경제협력도 지지세력의 특권적 지위―‘종북좌파’ 낙인을 아무한테나 찍어줄 권한을 포함하는 ‘수퍼갑’의 지위―를 위협하기 때문에 진도를 내기 힘들다. 그리하여 점점 작아지는 ‘파이’를 두고 계급·계층 간의 싸움이 더 치열해질 때, ‘소득주도형 경제’로 전환할 국가능력 또한 점점 줄어든다. 결국 괜찮은 일자리 창출 대신에 소수층의 비용부담을 삭감해주는 경제적 자충수를 계속 두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전망 없는 쿠데타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의심할 수 있지만, 지상목표가 나라야 어찌 되든 ‘해먹던 사람들이 계속 해먹는 것’인 사람들에게는 이 목표의 달성이 곧 성공이다. 그런데 87년체제의 한정된 민주주의조차 항시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에 그 위험부담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라도 하려는 것이다.

 

이때 그 쿠데타가 신종임을 간과하고 6월항쟁과 같은 민중총궐기를 촉구하는 것은 잘못된 진단에 근거한 잘못된 처방이다. 물론 길거리에서의 직접행동은 민주시민의 당연한 권리요 때로 의무이기도 하지만, 87년체제가 비록 훼손되었어도 6월항쟁으로 쟁취한 민주수호의 여러 수단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것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민주시민의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예컨대 선거공간과 더불어 6월항쟁의 또다른 열매인 삼권분립도 그사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하지만 지난 12월 5일의 평화적인 대중집회가 가능했던 것만 해도 법원의 독립적 결정에 힘입은 것이었고, 입법부에 대한 대통령의 부당한 압박을 견뎌낸 것은 정의화 국회의장의 상식적인 처신과 더불어 의석 5분의2 이상을 점유한 야당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세월호사건의 진실규명 작업도,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애당초 특별법 자체를 무산시키려 했고, 그게 안되자 시행령을 통해 법률을 무력화하려 했으며, 그런 방해공작을 뚫고 특조위가 출범하고 드디어 청문회가 열렸을 때 철저히 비협조로 나왔다. 그러나 국회가 아닌 민간이 소환권을 행사한 최초의 청문회가 조그만 진실의 조각 몇개라도 캐내는 것을 아주 막지는 못했다(이태호 「세월호 특조위의 첫 청문회가 남긴 것」, 창비주간논평 2015.12.23).

 

그렇더라도 87년체제는 극복의 대상이지 개량하고 쇄신해서 수명을 연장할 대상이 아니다. 이 점을 망각하는 것은 또다른 책임방기의 길이다. 신종 쿠데타가 착실히 진행될 수 있는 것도 최소한 저들 추진세력은 87년체제를 자기식으로 극복한다는―실은 ‘파괴’일 뿐이지만―목적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반대운동이 저들 못지않은 결연함을 보이고 진정한 극복의 비전을 제시할 때만 승산 있는 싸움이 가능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당연한 이 질문을 마주할 때 적잖은 곤혹스러움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87년체제를 극복할 ‘대전환’의 비전이 전혀 없거나 전환에 대한 일반 국민의 욕구가 희박해서가 아니다. ‘2013년체제’ 구상은 비록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87년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갈망은 오히려 더 커져왔고 풀뿌리 차원의 준비도 곳곳에서 진행되어왔다. 전환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신종 쿠데타가 추진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처럼 쿠데타 저지와 대전환의 달성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쿠데타 저지의 결정적인 방안도 시야에 들어와 있다. 수구세력의 장기집권이 쿠데타의 목표인 만큼 2017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꺾으면 최소한 이번 신종은 치명상을 입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이 곤혹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어차피 선거는 정당 중심으로 치러지게 되어 있고 여당을 꺾으려면 야당 후보가 이겨야 하는데 도무지 그게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안 생기는 것이다. 사실 2012년과 달리 야권에는 대선후보감이 많고 여당이 오히려 인물난이다. 문제는 코앞에 닥친 2016년 총선인데, 다음 대선이 87년체제가 건재한 상태에서 치러지는 ‘정상적’인 선거라면 총선은 총선이고 대선은 대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87년체제의 민주주의를 허물어가는 일련의 기획에서 19대 대선이 그 종결수순에 해당한다면 여당의 총선 압승은 그 기획에 엄청난 추진력을 더해줄 것이다. 그러잖아도 이제까지 신종 쿠데타에 번번이 힘을 보태준 것이 근년의 크고 작은 중간선거에서의 야당의 패배가 아니었던가.

 

답답하고 곤혹스럽다고 현장을 모르는 외부인이 정치권에 어떤 구체적 방책을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야당 지도자들에게 과연 현 시국을 신종 쿠데타 국면으로 보는 절박함이 있는지, 87년체제의 재활용이 아닌 극복을 설계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일은 시민의 몫이다. 지난번 대선 때 야당 후보가 ‘2013년체제’를 들먹이긴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야당 정치인의 압도적 다수는 87년체제가 열어준 선거공간에서 자신들이 당선되는 것이 곧 ‘전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저런 ‘혁신’과 ‘통합’ 구상도 쿠데타 저지 아닌 선거승리 위주의 발상에 머무는 느낌이다. ‘그것이 쿠데타 저지책으로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예컨대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 채 무산된 이른바 ‘문·안·박 연대’ 제안도 이 물음을 먼저 물었더라면 그런 식의 실패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부질없는 이야기가 됐는지도 모르지만) 한두달 전에라도 신종 쿠데타에 대한 위기의식이 공유되는 가운데 당대표가 혁신과 단합의 동시적 수용을 조건으로 대표직에서 선제적으로 물러났더라면 국민과 당원에게 감동을 주고 선거승리에 크게 이바지하는 길이 열렸기 쉽다. 또한 그러한 이바지의 한 수단으로 당내 유력 대선후보 3인이 사심없이 협업하는 연대가 가능했고 훨씬 위력적이 아니었을까.

 

야당인사들의 정치력이 그 수준이 못 됨이 명백해진 오늘 시민들이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이 크다. 다만 ‘그것이 쿠데타 저지책으로 적절한가?’라는 물음은 정치권에만 던질 질문이 아니다. 신종 쿠데타가 점진적이고 다면적인 만큼이나 그 대응책도 다양하기 마련이지만, 정확한 현실인식을 공유함으로써만 헛힘을 안 쓰게 되고 쓸데없이 상처 주는 일을 피할 수 있다. 나아가 신종 쿠데타를 막아내고 진정한 대전환을 이룩하는 작업에 동참한다는 자부심과 연대의식을 가짐으로써 매사를 더욱 자신있고 정성스럽게, 더욱 기쁜 마음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위기의식이 평상심과 결합할 때 2016년의 정치적 난제에 대해서도 한층 차분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길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새해에 독자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평상심으로 비상시국을 이겨내는 복도 많이 지으시기를 기원한다.

 

 

백낙청 / 계간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2015.12.3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