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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한국철학사』

우리에게도 이런 철학사를 읽는 기쁨이
-전호근 『한국철학사』, 메멘토 2015

 

 

gwhej20여년 전 후배들과 한국 근현대철학을 정리하기 위한 모임을 만든 적이 있다. 모임의 문제의식은, 남녘의 한국철학사든 북녘의 조선철학사든 모두 근대 이전으로 서술이 끝나 있는데 그렇다면 근대 이후는 한국철학이 없다는 것인가였다. 10년에 걸쳐 현대까지의 흐름을 정리해보기로 했지만 3년 동안 근대 시기를 다루고 나니 진이 빠져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끝을 맺어 아쉬웠다. 그뒤 진행한 북한철학에 대한 공동연구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공간까지 활동한 철학자들에 대한 연구들을 묶어 펴낸 책이 『강좌 한국철학』(예문서원 1995)이었고 이 작업에는 전호근 교수도 참여했다. 비록 대학 교양교재였지만 처음으로 근대 이후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남북을 아울러 현대까지를 서술한 책이었다. 그후로 후배들이 일제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상가들을 연구했고, 지금은 또다른 후배들이 한국 현대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이런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전호근의 『한국철학사: 원효부터 장일순까지 한국 지성사의 거장들을 만나다』를 보는 감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전기, 조선후기, 현대로 나누어 시대마다 대표 사상가를 뽑아서 서술하는 구성임에도,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풀어가면서 기존의 철학사에서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던 사상가들을 번듯하게 복권시켰고 현대에서는 박치우(朴致祐), 신남철(申南澈), 유영모(柳永模), 함석헌(咸錫憲), 장일순(張壹淳) 같은 분들을 전면에 끌어냈기 때문이다. 사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과 민족주의로 갈리고 해방 이후에도 진보와 보수의 이념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현실에서 비록 미완이기는 하지만 현대를 정리한 부분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 될 것이다.

 

이처럼 대단한 역작을 펴낼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저자가 지닌 뛰어난 능력과 각고의 노력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한문 원전 해독력이 뛰어난 학자다. 오늘날 동양학을 연구하는 중진 이상 학자들 가운데 한문 원전을 그만큼 읽어낼 수 있는 이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그저 한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수준이 아니라 적절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말로 옮기는 재주 또한 뛰어나다. 그래서 원효(元曉)부터 최제우(崔濟愚)까지 29명의 사상가를 핵심 원전에 대한 해설을 중심으로 서술하면서도 독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저자의 또다른 능력은 다른 사람의 학설을 쉽게 따르기보다 원전에 기반을 둔 자신의 분명한 생각으로 사상가를 읽어내는 관점이며 그러한 관점을 뒷받침하는 논리성이다. 그래서 “철학이 아니라 화석화된 유물 정도”였던 한국철학을 “지금 살아 움직이는 삶의 문법으로 복원”하겠다는, ‘서문’에서 밝힌 자신의 의도를 상당히 달성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그는 기존의 철학사 서술처럼 “철학의 연대기를 충실하게 구성하는 일보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자들의 사유가 오늘날 우리의 삶과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를 밝혀내려 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동서고금을 오가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다. 저자는 동양고전을 줄줄 꿸 정도로 해박하면서도 현대 사회현상이나 이론에 대해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클래식 음악과 사진, 회화 같은 분야의 마니아이기도 하다. 그래서 천여년 전 사상이 담긴 한문 원전을 현대적 의미로 끌어내는 데에도 뛰어나고 그 생각들을 탁월한 감수성으로 읽어낸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 노장사상의 수용을 설명하다가 존 케이지( John Cage)의 「4분 33초」를 끌어다 비유로 삼는 대목처럼 곳곳에서 읽는 이의 무릎을 치게 만든다. 

 

사실 이 책은 2012년 저자가 동대문정보화도서관에서 35회에 걸쳐 ‘전호근의 한국철학사 강의’라는 제목으로 했던 강좌의 녹취를 1년간 각고의 노력을 거쳐 정리해낸 것이다. 그래서 마치 강의를 직접 듣는 것처럼 생동감있게 읽어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이 35명이고 그 가운데 일부는 두세명을 묶어 한개 장(章)으로 다루었지만 아마도 한 강의에 한 사람씩 다루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강의준비 과정은 사상가를 가장 잘 드러낼 원전을 찾는 일과 그런 자료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설명논리를 세우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준비되고 정리된 분량이 무려 800면이 넘는다. 그리고 뒤에는 서술에서 다룬 한문 원전과 인명, 서명, 개념어 등의 색인을 붙였다. 

 

이 책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동안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학자들도 꼼꼼히 다루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의 강수(强首)와 설총(薛聰)은 기존 철학사에서 약간의 언급만 나오는 인물이지만 저자는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비중있게 소개한다. 고려시대의 경우도 이규보(李奎報)와 이제현(李齊賢)을 각각 한장으로 만들었고 조선시대로 오면 기존 철학사에서 관학파로 매도되어 주목받지 못했던 정도전(鄭道傳)을 독립시켜 다루고 있다. 더구나 각 사상가의 서술에서도 가령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다루면서 분량의 절반 정도를 「세한도」에 할애한 것처럼 사상 전반을 다루기보다는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소재를 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현대철학 부분에서는 강단철학에서 시작하여 강단 밖에 있었던 다석 유영모, 씨알 함석헌, 무위당 장일순까지를 다룬다. 저자는 이 세 사람 모두를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동양 고전학문의 골동품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시대와 함께 사유’하는 지성의 역할을 보여준 사람들, 학술의 한계를 넘어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실천한 사람들로 자리매김한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유교에 눌려서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사상적 명맥을 유지했던 조선시대 불교를 다루지 않은 점과 만해 한용운(韓龍雲), 단재 신채호(申采浩), 백암 박은식(朴殷植), 위당 정인보(鄭寅普), 심산 김창숙(金昌淑)처럼 전통의 계승 또는 극복의 관점에서 돌아볼 만한 사상가들을 다루지 못한 점이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지금의 서술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 쇄가 되며 앞으로 전호근 교수에게 거는 또다른 기대로 남겨두어도 좋을 듯하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에 수록되었습니다.

 

김교빈 / 호서대 교수, 동양철학

2016.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