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4차 핵실험 이후, 한반도와 남북관계는?
공상(空想) 속의 ‘신뢰’
북한의 4차 핵실험(북한 표현은 제1차 수소탄 시험) 이후 한반도 상황과 남북관계의 시계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수소탄 실험의 진위와 같이 쉽게 밝혀지기 어려운 논란을 제외하면, 이번 핵실험이 지난 실험과 다른 점의 하나는 한국정부가 전혀 예측하거나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점이다. 이것은 흔히 지적하는 정보의 무능이라기보다는 한국정부의 북한에 대한 무지 혹은 ‘참을 수 없는’ 남북관계 타산의 가벼움을 의미한다.
그간 박근혜정부는 이른바 ‘통일대박’이라는 언술 아래 남한 주도의 비합의통일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면서도 일면 북한을 무력으로 어르고 또 일면 ‘대화’를 내세워 적당히 달래면 북한이 ‘신뢰프로세스’에 끌려올 것이라고 판단해왔거나 혹은 그런 ‘희망적 사고’를 기정사실처럼 유포해왔다.
작년 8·25남북합의에 대해 정부는 ‘확고한 도발불용 태세로 북한의 사과를 받아낸’ 성과라고 홍보해왔고, 또 북한의 당창건 70돌 직전 “‘핵뢰성’으로 대답하겠다”는 핵실험 시사에도 불구하고 올해 신년사에 ‘핵무력경제건설병진노선’ 언급이 없었다는 이유로 남북관계 상황을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12월의 남북차관급회담이 성사되는 국면에서도 정부는 ‘원칙을 지키면서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낸’ 8·25합의의 모멘텀을 강조하면서 ‘국민의 신뢰와 지지’ 등 국내정치에만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미 2014년 이전부터 북한은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심각한 불신의 태도를 보여왔고, 8·25합의 이후에는 “남조선당국이 말로는 대화에 관심이 있는 듯이 놀아대지만 실제로는 우리와 끝까지 대결할 흉심밖에 없다”(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담화 2015.11.27)라며 노골적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는 결국 군사력을 통한 힘의 우위 과시와 내부 불안정성 자극을 통해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어 남한 주도의 ‘통일국면’을 열겠다는 박근혜정부의 ‘희망적인’ 대북정책이 사실상 공상이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북한에 대한 현실적 예측도 실패해왔음을 의미한다.
만약 일부 미국 언론에서 보도하는 대로 미국정부가 2주 전에 이미 북한 핵실험을 인지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미국이 한국정부를 독립적인 협력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있거나 아니면 북핵문제가 아시아회귀전략 등 미국의 이해관계에 유리하다는 판단 외에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작년 12월 북미 사이에 비공식접촉이 있었고, 거기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이나 평화협정과 관련된 북한의 제안이 계속 묵살되면 핵실험하겠다는 의견이 미국에 전달되었다는 것도 정설로 유력하다. 이상의 일들이 사실이라면,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그 튼튼한 한미동맹 사이에도 ‘신뢰’는 공상 속에만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무력시위의 딜레마
이번 북한 핵실험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다음 두가지이다. 하나는 김정은정권이 북한의 ‘안전’이 불가역적으로 보장된다고 판단하지 않는 한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에 이를 때까지 계속 핵능력을 강화해나갈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전략적 인내’로 포장된 미국과 한국의 대북 방임정책 혹은 적당히 어르고 달래는 식의 대북정책이 북핵 저지라는 핵심목표 달성에 사실상 실패했다는 점이다. 즉 미국의 아시아회귀 등에 중대한 명분이 되고 있기 때문에 북핵문제가 ‘적절히’ 방치되고 있는 상황과 그러한 상황을 기정사실로 수용하는 현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 기조 하에서는 북한의 핵능력 강화를 막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국면으로 전환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번 핵실험 이후 한미 양국의 대응에는 강력제재, 무력시위, 중국책임론 등 익숙한 ‘데자뷔’만 있을 뿐, 기존 대북정책의 수정이나 새로운 접근에 대한 검토 분위기는 전혀 없다. B52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을 동원한 한반도에서의 (핵)무력시위는 오히려 북한으로 하여금 “방대한 각종 핵살인무기로 핵참화를 들씌우려는 미국의 핵전쟁도발책동에 대처하는 것은 우리 공화국의 마땅한 권리”이고 “정의의 수소탄은 우리의 긍지”(조선중앙통신 2016.1.8)라는 식의 핵무장 논리만 정당화시킬 뿐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박근혜정부의 성급한 대북 확성기방송 재개 결정인데, 이는 비핵화 문제를 남북 군사대치로 전환하는 자승자박 조치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이제 대북심리전을 중단할 수 없게 되었고, 북한 역시 8·25합의에 의하면 즉각 준전시상태로 복귀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반도가 점점 ‘전쟁접경’에 내몰리고 있다는 주장이 지나친 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한미 양 정부가 소리 높여 강조하고 있는 중국책임론도 부적절하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중국의 북한정책은 이미 실패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였으나, 중국은 “북핵문제의 진정한 문제점은 북한과 미국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미국이 분한 나머지 중국을 원망하고 있다”고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굳이 중국의 입장을 들지 않더라도 북핵문제의 근본 원인이 “내부적으로는 북한이 안보의 길을 잘못 선택한 것이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뉴스1 2016.1.9)이며, 동시에 북핵문제의 악화는 미국의 전략적 인내가 북한 핵능력의 강화를 방임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미국의 아시아회귀, 일본의 전쟁국가화, 그리고 한국정부의 비합의통일 추구 분위기 확대가 결합된 한·미·일 군사동맹의 강화와 대중국 봉쇄망 구축 하에서 ‘중국이 협력하는’ 유효한 북핵 대책을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북핵문제와 관련한 그간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은 이른바 ‘북한의 진정성’ 같은 극히 자의적이고 추상적인 기준을 내세워 대화 회피의 모든 책임을 북한에 떠넘기는 것이었고, 실제 북한의 핵능력 확대와 핵실험이 연속되는 상황에서는 기존 대북정책의 성찰과 재검토 대신 언제나 ‘중국책임론’만을 내세우며 사실상 북핵 대응 실패의 책임을 회피, 전가해온 것이 전부였다.
험로 속의 2016년 남북관계
북한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는 사실상 전망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한반도는 대북 확성기 방송 같은 화약고의 불씨를 이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전략자산을 동원한 핵무력시위의 강화로 중국의 반발 확대 및 가속화되는 일본의 전쟁국가화라는 겹겹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시간적으로도 한반도 문제를 본격적으로 추구하기에는 오바마정부는 물론 박근혜정부도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북한 핵실험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정부가 냉정을 되찾고 새로운 대북정책으로 전환해나가는 가능성이 바늘구멍처럼 보이는 현실만큼이나 2016년의 남북관계는 험로를 겪을 것이다. 2·16 김정일 생일이나 5월 당대회 전에(혹은 미국의 새 정권이 가시화되기 전에)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움직임에 맞춰 북한은 인공위성을 주장하며 로켓발사 시험을 추진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이 명분보다 실질적 핵 억지력 확보에 진력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밝힌 것이 이번 핵실험이라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향한 실험도 명분에 집착하지 않고 추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야를 돌리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남북관계와 한반도 상황을 교착시키고 있는 핵심 문제에 바로 접근하는 것이다. 북한이 ‘이것이’ 근절되지 않는 한 결코 핵을 포기하거나 그 개발을 중단하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한미 양국의 대조선 적대시정책이다. 그리고 그 대조선 적대시정책의 기본표현을 북한은 “대규모 합동군사연습 강행과 핵타격수단들의 남조선에로의 반입”(‘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대변인담화’ 2015.10.17)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핵능력 확대를 저지하고 핵 포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소한의 댓가를 치르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한미합동군사훈련 등 북한이 제기하는 이른바 대북 적대시정책의 부분적 축소나 중단 등의 조치가 검토될 수밖에 없다. 즉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잠정적인 중단·축소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의 중단을 서로 주고받는 ‘동결식’ 상황타개 접근은 지금이라도 가능하다.
이런 정도의 상응조치를 취하지도 않으면서, 협상은 보상의 악순환만 부른다는 식의 주장만 반복하는 것은 또다른 책임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동결식 상황타개가 현재로서는 시계불명의 한반도 정세를 정상화시키고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동력을 확보하는 거의 유일한 ‘위기 속의 기회’일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를 추구하지 않아도 남북관계 관리에 대한 남북 각각의 정치적 수요가 증대하면 다시 대화국면이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구조적 대립이 고착되는 속에서 이벤트처럼 ‘대화’가 진행되는 ‘대화 있는 대결’의 재판(再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승환 /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2016.1.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