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평화체제의 입구론과 비핵화 팻말론
한반도의 군사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인상이다. 남북관계를 꾸준히 모니터링하지 않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작금의 사태가 북한의 느닷없는 핵실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사실 그 연원은 생각보다 길다. 굳이 북핵 문제의 구조적 요인을 따질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북한의 공세는 자신들이 지난해 1월 9일 정성들여 제안한 핵실험 모라토리움 안이 무참히 거절당한 데 대한 논리적·물리적 보복으로 볼 여지가 있다. 당시 북한은 핵실험을 동결할 테니 그 전제조건으로 한미군사연습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일견 구태이자 뻔한 선전전으로 보이기도 했던 이 제안에 대해서 북한이 일년 넘도록 집요하게 그 이행을 요구한 데는 그것이 김정은이 직접 제안한 화해 조치이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설명서까지 따라다닐 정도이다.
대북 무시 전략의 병리학
위기를 위기로 보지 않는 무시 전략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김정은 아니라 그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제안한 핵실험 동결안이라도 일고의 협상 가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성역에 속하는 ‘한미군사연습’의 중단을 조건으로 걸고 나온 한 잘해야 통미봉남(通美封南)이고 아니면 또다른 도발의 명분을 쌓기 위한 속셈에 다름 아닌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핵무기의 실전 배치와 이에 따른 군사 교리의 변화를 완성시키고 있다는 북한의 선전을 다 믿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핵동결 제안은 핵무기의 실전 배치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기술적 의사 결정을 둘러싼 군축 안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북한의 행동을 항상 병리학적 프레임의 틀에서 바라본 입장에서 이런 해석은 군사능력을 과잉 선전하고자 하는 북한에 놀아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리스크 회피를 행위의 제1목적으로 하는 안보 인식에 따르면 북한에 대한 과잉 무시 또한 대북 시혜적 접근법이 낳은 집단 병리로 보일 수도 있다.
사실 남북기본합의서 불가침조항 12항에서 이미 합의하였듯이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 및 통제 문제’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실현 문제’ 등은 평화협정과 불가침 논의의 출발점이다. 모든 전쟁연습, 또는 일정 규모 이상의 군사훈련을 서로 배제하는 원칙을 빼버리면 어떤 논의도 상호주의의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북한의 1월 9일 제안은 이 점에서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의 상호 제거라는 거래적 접근과 무관하지 않다. 정치전략이나 외교 수사가 아니라 군축론의 기본 프로세스에서 본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상호동결론과 물밑 협상
얼마 전 미국 CSIS(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빅터 차 교수가 미국 내 대북 협상의 형판(形板, template)이 바뀔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평화협정 논의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월 26일자 중앙일보 칼럼에서 미국이 25년간 고수해온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 원칙을 버리고 비핵화와 평화협정 동시 병행론을 수용해가고 있음을 지적했다. 미국 국무부가 “핵무기가 단지 한 요소에 불과한 포괄적인 평화협정” 협상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선례를 남겼다는 것이다. 빅터 차는 그것이 학술적 수준에 불과할 뿐 당면한 대화가 있을 거라 예측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발 물러섰지만, “미국이 어떤 새로운 유연성을 발휘하면 역내 국가들은 미국이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반기지만, 워싱턴 정가에서는 이를 절박함과 나약함이 결합된 결과라고 평가”하는 ‘협상 함정’에 빠질 것이라는 비판을 잊지 않았다.
“지금 최고의 외교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는 것”이라며 한국의 개성공단 폐쇄를 부추겼던 빅터 차에게 근심을 던진, 미국의 이런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개성공단 폐쇄라는 징벌적 대북 제재론의 발상법을 지닌 한국이 진원지라고 보긴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중국발(發)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중국이 이란에서와 같은 선의의 중재자(honest broker)로 기능하는가 하는 점이다. 일부 학자들은 작금의 세계정세를 지정학으로의 회귀라 부른다. 러시아, 중국의 신형 패권주의에 미국이 국제규범이나 가치외교를 통해 대응하지 못하고 동일한 이익거래의 관점에서 대응한다는 것이다. 결국 강대국 정치의 부활이라는 것인데, 이번 북핵 사태 이후의 상황 전개 과정을 보아도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의 영향권(sphere of interest)을 양분하고 한반도 관리체제를 수립하고 있는 듯하다. 임기 말 강대국 간 이익 교환이라는 쉬운 길을 택한 오바마 ‘국무부’가, 중국이 주장해온 ‘신형대국관계’를 수용한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대차대조표를 왜소한 한국과 불편한 일본, 여러개의 미국 그리고 득의만만한 중국이라고 그릴 수 있는 것도 그래서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남북 모두를 길들이는 중국의 지정학적 채찍만 남은 채, 핵전략 따로, 지정학 따로, 동맹외교 따로인 미국의 다양한 얼굴 앞에 한반도 평화관리가 표류할지도 모를 일이다.
비핵화 팻말 들고 입구에 정렬하기
결국 현 사태를 진정시키는 길은 한미군사연습에 손을 대는 것이다. 비핵화와 평화협정 동시 병행의 고리는 한미군사연습의 중단 혹은 축소를 한 축으로 하고 북한의 핵과 로켓을 동결하는 것을 다른 축으로 하는 협상안을 입구에서 수용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출구가 보이지 않는 평화협정 협상이라는 긴 굴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북한이 레토릭일지라도 비핵화라는 팻말을 들고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핵-경제 병진 노선’ 대신에 ‘비핵화는 수령님의 유훈’(2006)이라든가 ‘비핵화를 위한 핵실험론’(2009) 같은 기상천외하고 기기묘묘한 글귀라도 들고 나와야 한다. 북한의 ‘수소탄’ 실험과, 한국과 유엔의 ‘최강 제제론’이 그런 류의 팻말마저 걷어차버린 건 아닌지, 그래서 입구를 봉쇄해버린 건 아닌지 그게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이정철 /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16.3.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