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행정고시를 없애자: 관료제 개혁을 위한 제언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사회개혁을 위한 좋은 발상과 제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안에 활발한 후속논의가 이어지고 그것이 공론을 일으켜 마침내 실제 개혁으로 나가는 과정이 토막 나 있는 것 아닐까 싶을 때가 꽤 있다. 내 보기에 정대영의 「관료개혁, 4대 방안으로 실현하자」(『창작과비평』 2015년 봄호)도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예의 하나이다.
정대영은 이 글에서 관료제 개혁의 네가지 방안을 말하는데, 그 첫머리에서 행정고시를 없애자고 한다. 그는 그런 주장이 그리 과격한 것이 아니라며, 박근혜 대통령 또한 세월호참사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 중 하나로 행정고시 선발인원을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민간경력자로 충원하는 방안을 발표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정대영의 제안에 대해 사회적 반향이 별로 없었듯이, 내가 아는 한 단 한사람의 기자도 박근혜 대통령이 공언한 행정고시 개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추궁한 적이 없다. 행정고시 개혁은 이렇게 논의가 잘 활성화되지 않는데, 왜 그런지 한번 따져볼 문제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대영의 제안이 가진 여러가지 함의를 먼저 생각해보고 싶다.
행정고시 폐지의 효과, 그리고 관피아 척결
행정고시 폐지의 긍정적 효과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행정고시는 출제해보지 않았지만 연전에 입법부 공무원 임용을 위한 입법고시 문제를 출제해본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런 시험을 통과해 5급 공무원에 임용되는 이들이 독서경험이 풍부하고 지적이며 시험 보는 데 ‘선수’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공무원에게 필요한 기본은 공적인 마인드와 봉사정신인데, 다분히 선발을 위해서 복잡하게 꼬아놓은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그것을 형성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스럽다. 그보다는 밑바닥 대민업무 경험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공무원의 출발선은 9급 또는 7급인 것이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할 수 있다. 게다가 행정고시가 폐지된다면, 공무원사회 전체에서 승진의 전망이 넓어지는 만큼 헌신적이고 창의적인 업무태도 그리고 엄격한 자기관리 풍토도 강화될 것이다.
행정고시 폐지의 효과는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관피아’ 척결같이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개혁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점을 좀 자세히 살펴보자. 대학진학률이 30퍼센트를 좀 넘던 80년대 중반에 괜찮다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는 세대적 배경이 작동한 것이긴 하지만, 내 자신이 50대에 들어서서 이른바 잘나간다는 친구들을 보며 느낀 것은 50대야말로 우리 사회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중앙정부 국장급 공무원, 대기업 임원, 언론사 데스크, 군 장성이 다들 50대였다. 따지고 보면 50대를 중심으로 하는 이런 엘리트 정렬을 주도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고위공무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50대이기 때문에 그들과 상대할 대기업 임원이 50대가 되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50대를 중심으로 사회적 엘리트가 정렬되는 것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관료든 기업임원이든 우리 사회 엘리트 가운데 다수가 50대 초중반에 자기 경력상의 정점을 찍고 50대 중후반이면 벌써 중심에서 벗어나 퇴직을 준비해야 할 운명에 처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만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이 불안한 이유는 여전히 상당한 수입이 필요한 나이이기 때문이다. 자녀들도 아직 미취업이거나 취업해도 미혼(당연히 비혼도 있겠지만)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연금 수령까지도 여러 해가 남아 있다. 그런데도 퇴직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몹시 불안한 일이다. 이들이 불만인 이유는 여전히 자기 안에 경륜과 활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일하고 싶고, 더 잘 해낼 자신이 있는데,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화가 나는 일이다.
이런 상황은 고위공무원들의 퇴직 후 일자리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들은 민간기업의 임원들과 달리 그런 일자리를 창출할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들은 퇴직 후 산하 공기업, 관련 협회, 금융기관, 법무법인과 회계법인, 대학, 언론, 민간기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자리를 얻는다. 이 과정이 이른바 관피아 형성의 주요한 경로이기도 하거니와, 퇴직 후 일자리에 대한 관심이 수백수천억 때로는 수조원의 예산을 다루는 현직의 정책결정과 예산집행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정부의 50대 고위공무원은 선발과 경력 과정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능력이 응집된 인적 자산이지만 동시에 잘 관리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집단인 셈이다. 그런데 언론보도에서 빈번히 접하는 것은 이들의 퇴직 후 취업을 통제하려는 각종 법적 장치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좀더 천천히 오래 재직하는 사회를 위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행정고시 폐지가 도움이 된다. 행정고시를 폐지하여 5급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공무원을 없애서 모든 공무원이 7급이나 9급에서 출발하면 고위공무원이 되는 연령은 지금보다 한참 뒤로 미뤄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앞서 지적한 불안과 불만으로부터 한결 벗어난 연령에 퇴직을 맞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취업 욕구도 줄어들어 관피아 문제도 완화될 수 있다. 그리고 고위공무원 퇴직연령이 늦춰짐에 따라 민간기업 임원의 연령도 올라가게 될 텐데, 그것은 기업에서의 재직연한을 늘려 사회를 더 안정화할 것이다.
혹 이런 제안을 보고 필자가 친구들의 재직연한을 늘려보려 한다고, 가뜩이나 젊은 세대에 비해 좋은 정규직에 많이 진출했던 세대가 자신들의 퇴직시기를 늦추려는 ‘꼰대질’을 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해 마시라. 내가 정대영과 더불어 주장하고 싶은 제도변화의 수혜자들은 내 세대가 아니고 지금 7급이나 9급 공무원을 준비하거나 그런 자리에 막 임용된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의 경력과정에 맞추어 변동될 민간부문의 젊은 취업자들일 테니 말이다.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6.5.1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