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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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제라르 뒤메닐 외 『대안마르크스주의』

계급 개념의 변주를 통해 본 대안적 맑스주의
-제라르 뒤메닐·자크 비데 『대안마르크스주의』

 

 

rehejj흔히 사회(과)학에서 논의되는 ‘사회’ 개념을 거칠게 요약하면 크게 두가지의 의미궤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시장 모델을 통해 대표되는 것으로 공동체의 해체 이후 나타난 익명의 추상적 공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18세기 정치경제학이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 것이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첫번째 정의와 다소 대립하는 개념으로 인간들 간의 어떤 상상적 유대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19세기초 ‘사회과학’을 뜻하는 프랑스어 ‘sciences sociales’가 영국에 처음 도입될 때 선택된 번역어는 놀랍게도 (social science가 아니라) moral science, 즉 도덕과학이었다. 시장의 익명적이고 차가운 공간에서 생겨나는 죽음과 소외에 맞서 19세기 유럽인들은 탈개인주의적 유대의 대안적 공동체 모델을 찾고자 했다. 19세기에 생겨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을 형성했던 대표적 사상이 하필 ‘사회’주의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시장’과 ‘조직’의 개념으로 재구성된 맑스주의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대안마르크스주의』(김덕민 옮김, 그린비 2014)는 근본적으로 이 ‘사회’ 개념에 함축된 두개의 의미자장을 맑스주의적 논쟁사 속에 개입시켜 발전시키려 한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현대 자본주의의 내적 동학을 규정하는 근본 요소로 가져오는 것은 ‘시장’과 ‘조직’의 개념이다. ‘시장’은 앞서 정의한 ‘사회’의 첫번째 개념에 상응한다. 그렇다면 위의 개념 구분에 따라 자연스레 ‘조직’이 ‘사회’의 두번째 의미와 깊게 연결됨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장과 조직의 만남을 통해 구성된다. 시장이 ‘소유’의 관계를 구성하는 곳이라면, ‘조직’은 생산을 담당하고 관리하는 장소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상품이 유통되기 위해서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생산은 처음에는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그리고 이후에는 매뉴팩처를 거쳐 대공업으로 거대한 규모의 조직형태를 띠며 발전한다. 자본주의는 조직의 형태를 띠는 생산단위들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작동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노동자들을 무더기로 잡아두고 일을 시키던 공장들이 생산의 효율을 높이고 노동자 저항을 완화하기 위해 공장에 유기적인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20세기초 테일러리즘으로 알려진 생산효율화 시스템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경영혁명’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때부터 기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경영/관리의 기능을 심화시킨다. 특히 전후 자본주의체제에서 경영자들의 권한은 크게 강화되는데, 간전기(間戰期)에 부상한 노동자운동의 영향으로 전후 자본소유자들의 권한이 크게 축소되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전투력에 기반해 세계대전 후 형성된 계급타협의 지반 위에서 자기 입지와 권한을 강화한 이들이 경영자/관리자들이었다. 서구자본주의의 경영자/관리자는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 국가(‘복지국가’) 모델에 따라 주주들(자본소유자)의 이해관계가 사회의 유대와 국가적 안정성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일정하게 제어하고,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압력과 자본소유자들의 위로부터의 요구(자본수익성과 관련된 요구)를 컨트롤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유사한 기간에 사회주의운동에도 ‘조직’의 정치적 문제가 불거졌다. 예컨대 20세기초 사회주의 사상사의 핵심 화두 중 하나는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위와 대중의 관계설정, 즉 당의 혁명적 지도와 대중의 자생적 민주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이 논쟁은 간전기를 거치며 사실상 전자의 우위를 확정하는 과정을 밟게 되는데, 저자들에 따르면 20세기 사회주의국가는 이 논쟁의 대립구도 속에서 대중의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관료적 관리주의 모델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 저자들은 사회주의적 ‘간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프랑스어 ‘cadre’를 자본주의의 ‘경영자’를 지칭할 때도 사용하는데(덕분에 한국어판에서도 ‘경영혁명’이 ‘관리혁명’으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소유와 관리의 분리’라는 이상한 표현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그들이 자본주의 기업의 경영자를 당의 간부, 그리고 국가의 공직자 모델과 동일한 범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크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서의 ‘근본계급’으로 나뉘는바 전자에는 자본소유자와 경영자가, 후자에는 노동자, 농민 등의 계급이 속하게 된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이러한 계급구분에서 자본소유자가 사라진 “순수 관리주의” 사회이며, 관리자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지배계급의 위치를 점유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무엇보다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의 이항대립적 계급구분을 취해왔던 맑스주의 계급 개념에 대한 도전을 포함한다. 이들에 따르면, 기존의 이항대립은 정작 ‘조직’과 그 ‘관리’의 문제를 화두로 제기한 20세기 자본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게 하며, 특히 전후 타협으로 전면화된 계급동맹의 체제를 이해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회주의운동의 역사가 왜 관리자들의 지배로 귀결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나아가 이 책은 기존 맑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론의 이원적 개념을 메타구조-구조의 개념쌍으로 대체하여, 경제적 구조가 정치적 관념에 반영되는 것(토대-상부구조론)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미완의 정치적 기획이 사회주의를 통해 완수된다는 관점을 제기한다. 요컨대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처럼 자유주의는 권리를 선언하고, 사회주의는 선언된 권리를 투쟁을 통해 구조적으로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범주의 혼란과 분석의 결핍

 

대체로 맑스주의 사상사의 핵심적 범주들을 포괄적인 역사해석을 통해 혁신하려는 이 책의 시도는 그럼에도 몇가지 의문점을 남긴다. 저자들이 직접 말하듯이, 전후 자본주의의 타협은 조직 내의 타협이 아니라 기업이나 조직 범주 바깥으로 전면화된 계급투쟁 속에서 형성된 타협이었다. 그리고 그 계급투쟁 속에는 앞서 설명한 ‘사회’ 개념의 복잡성이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으로, 이것을 ‘조직’이나 ‘관리’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은 ‘사회’라는 근대 정치공동체 모델을 너무 협소화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심지어 자본주의 경영자와 당 간부 그리고 혁명적 지식인까지를 한데 묶어 표현한 cadre(원래 ‘틀’ ‘간부’ ‘관리자’ 등을 의미)라는 개념은 19세기 중반 이후 근대 사회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한 인텔리겐차 개념을 관리자라는 단순 범위로 환원할 위험마저 존재한다.

 

그래서였을까. 저자들은 아무런 충실한 역사분석도 없이 20세기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관료적 관리주의 체제로 규정해버린다. 왜 한때 해방의 투사였던 이들이 ‘관료적 관리주의’ 체제로 빠지게 된 것일까? 당과 대중, 지식인과 근본계급의 선험적 도식으로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분석을 손쉽게 대체해버린 것은 아닐까? 2007년에 프랑스어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이듬해 미국을 중심으로 폭발한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 다시 한번 대안적 이념과 실천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을 부추기고 있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사회’가 종언을 알리는 오늘날 이 모든 논의들은 보다 구체적인 분석과 논쟁적 해석을 통해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서 간단히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명료하고 단순한 저자들의 문체에 비해 한국어 번역은 오역과 비문 사이에서 모호한 줄타기를 하는 난독성 문장으로 가득하다. 우선 166면의 문장을 예로 들어보자. “심지어 법을 통해 정당화된다 하더라도 유일당은 이러한 사회 내에서 형식적으로 선언된 현대질서라는 견지에서 민간기관으로 출현한다”라는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유일당은 헌법에 의해 정당화되었음에도 그 사회에 공식적으로 선언된 현대적 질서의 관점에서 볼 때는 사적인(privée) 기구로 나타난다.” 120면의 번역문인 “기능자본가의 업무를 위임받은 집단들 내부의 대립을 채택하고 있는 계급관계의 출현은 관리관계가 내세우는 첫번째 원을 정의한다. (…) 관리주의적 관계의 진전은 또 다른 임금소득자들 전체에 직면하고 있는 근본계급들의 관계로서 위치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라는 부분은 이 책 전반의 번역 문제를 가장 일반화한 것으로, 번역을 새롭게 하면 다음과 같다. “현행 자본가의 업무를 위탁받은 집단들 내부에 균열을 야기하는 계급관계의 출현은, 관리관계가 실현되는 최초의 범주를 규정한다. (…) 그 관계의 진전은 점진적으로 근본계급이 임금소득자 전체와 직면하는 관계로 귀결되었다.” 버겁더라도 원문대조는 필수다. 

 

 

정현 / 정치철학 및 매체학 연구자

2016.5.1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