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100년의 고통을 넘어선 이들: 국립소록도병원 백주년을 맞이하여
필자는 최근 3년간 ‘소록도병원 100년사’ 집필을 위해 소록도를 자주 방문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소록도로 들어가는 유일한 수단은 조그마한 배뿐이었다. 그 배를 기다리며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올 수 없는 환자들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만들어진 덕분에 그러한 물리적·심리적 준비과정 없이 바로 섬으로 들어갈 수 있어 소록도에 가는 것이 예전만큼 힘들지 않다. 사회와 섬을 잇는 물리적 다리가 소록도 주민과 외부인들의 심리적 거리도 좁혀준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은 외부인과의 접촉을 꺼려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데 조심스러워하는 소록도 거주민들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인데, 지금 주민들은 외부인과의 접촉을 점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국립소록도병원 백주년 기념사업에 자신들의 질병, 격리, 차별의 경험이 포함될 수 있도록 준비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만들어지게 된 데에는 근 백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편견과 고통으로 점철된 한센병 100년 역사
1916년 조선총독부가 전라도 고흥의 끝자락에 위치한 소록도에 소록도자혜의원(현 국립소록도병원)을 설립한 이래 소록도는 오랫동안 국가가 한센병을 관리하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한센병은 박테리아에 의한 만성전염병으로 초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말단신경 등이 손상돼 장애를 입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신체에 변형이 생기기 때문에 환자들은 오랜 시간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소록도병원의 입장에서 지난 백년을 회고하자면 한국은 이미 1992년에 ‘한센병 퇴치’가 선언된, 한센병 관리정책의 모범이 되는 국가이다. 일부에서는 소록도병원이 공공의료의 모범이자 미래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센병이 아닌 한센병 환자의 입장에서 그 백년은 피와 눈물로 얼룩진 고통의 시간이었다.
소록도는 우리에게 의료와 공중보건의 발전이 개인의 삶의 질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근대적 믿음이 과연 정당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져준다. 푸꼬(M. Foucault)는 『광기의 역사』에서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던 공간이 정신병 환자 수용공간으로 대체되면서 유럽의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식민지 국가들에서는 오히려 근대의 시작과 함께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시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서양의 근대가 이성의 확립으로 시작되었다면, 식민지에서의 근대는 질병과 몸의 통제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미국은 필리핀의 쿨리온(Culion)에, 영국은 말레이시아 순가이(Sungai)와 인도에 수십 개의 격리시설을 만들었고, 일본은 자국 내 그리고 조선의 소록도와 대만(낙생원樂生院)에 한센인 격리시설을 설립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한센병 환자 격리시설을 만드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렇듯 식민지 국가에서 근대적 의료제도는 제국주의, 인종주의, 또는 제국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과 결합하여 모습을 드러냈다. 최소한 한센병 환자에게 있어 식민지적 근대의료는 개인 삶의 질 개선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식민지시기 소록도병원은, 조금씩 치료와 연구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하긴 했지만 주요 기능은 계속 격리였다. 병원은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엄격한 규율을 강요했고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저항하는 환자는 감금하거나 단종수술을 자행하였다. 의학의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검증되지 않은 약제의 임상실험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물론 전통사회에서도 한센병 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이내 근대적 의료지식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보편화되었다. 동시에 그 시스템 속에서 한센병 환자는 치료받고 격리되어야 하는,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호명되었다. 제국과 근대적 의학이 분투하여 한센병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을 보며, 한센병과 한센병 환자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과 차별은 정당화되고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 최종결과가 해방 이후 전쟁을 거치는 사회혼란기에 전국 곳곳에서 자행되었던 지역민들의 한센병 환자에 대한 학살사건이다. 환자에 대한 무지와 공포심 그리고 적대감이 합리적인 것으로 둔갑되어 학살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격리되고 치료받아야 할 ‘신민’이었던 한센병 환자는 해방 이후 국가에 의해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신약의 개발로 치유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이들의 사회복귀가 주요 문제로 등장하였다. 국가는 관리 부담을 줄이기 위해 편견으로 더이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한센인들을 허허벌판에 보내 정착하도록 했다. 이제 한센인들은 경제적 자립과 ‘사회순화’를 이루어야 할 근대적 국민으로 호명되었다. ‘사회순화’란 한센인들이 사회에 위협감을 주는 부랑을 그만두고 근면한 노동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시각은 한센인들에게 뿌리깊게 내면화되는데, 이들은 경제적 자립만이 자신들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 길이라 믿었다. 또한 사회의 반감을 줄이고 정부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한센인단체는 스스로 부랑 한센인들을 잡아 소록도에 보냈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가늠하는 계기로
그러나 한센인들이 이러한 억압을 마냥 감내했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시기 소록도의 환자였던 이춘상은 억압적 통제와 가혹한 강제노동에 저항하여 당시 원장이었던 스오 마사히데(周防正秀)를 살해했는데, 이는 일제의 가혹한 인권침해에 저항한 인권운동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해방 이후 한센인들은 자조(自助)단체를 결성하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분투했다. 그 결과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제적으로 성공한 한센인집단이 형성됐다. 이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경제적 부와 경험을 바탕으로 1994년 세계한센인연합회인 IDEA(Integration, Dignity, and Economic Advancement) 협회의 창립을 주도하였고, 세계 한센인들에게 한국의 정착촌 중심의 경제적 자립모델을 전파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병의 치유, 경제적 자립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차별은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결과 스스로를 사회에 떳떳이 드러내지 못했 고, 사회는 이들이 조용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한센인이 자신들의 경험이 부당하며 그것이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민주주의가 발전되고 인권담론이 확대된 2000년대 들어와서이다. 시작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식민지시기 소록도에서의 한센인 격리에 대한 소송이었다. 이 소송을 통하여 한국의 한센인들은 일본과 대만의 한센인들과 연대의 경험을 가졌고, 격리가 부당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2001년 출범된 국가인권위원회는 한센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2005년 처음으로 한센인인권실태조사를 벌였다.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이후에 한센인 피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으며, 현재는 소록도에서 자행되었던 단종과 낙태 수술 피해자들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개인이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다. 시대정신이었던 근대 의학, 개발주의 앞에 선 개인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특히 그것이 국가와 사회에 주는 과실이 분명할 때 우리는 그것의 부작용에 대해 합리적 비판조차 못하게 되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신화’가 탄생하며, 시대정신은 종교가 된다. 한센병과 한센인의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것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비판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소록도는 과거의 유물로 남겨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어야만 한다. 다행히 100주년을 맞아 국립소록도병원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소록도병원 100년사’의 발간, 백주년기념행사에 포함된 국제학술대회 및 한센병박물관 개소식은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다가오는 또 다른 백년, 소록도가 신화를 깨뜨리는 영감을 주는 장소로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김재형 /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소록도병원 100년사』(근간) 의료사 편 공저자
2016.5.1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