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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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도나 힉스 『관계를 치유하는 힘, 존엄』

‘존엄’에 대해 우리가 안다는 것
--도나 힉스 『관계를 치유하는 힘, 존엄』, 검둥소 2013

 

 

jtrjtr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켄지(丸山健二)는 한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동물로 태어나 동물로 죽으며 인간으로 죽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린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 노력은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식별력이라 할 ‘교양’을 습득하려는 의지와 긴밀하다고 지적한다. 고개를 주억거릴 만한 말이지만 요새 한국사회를 둘러보노라면 켄지가 말한 ‘동물’의 ‘인간-되기’보다 긴급한 어떤 문제가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건 바로 우리들이 현재 목도하고 있는 인간의 ‘벌레-되기’라는 자조적 흐름에 관한 것이다.

 

무한증식하는 ‘벌레’들의 시대

 

바야흐로 이곳은 ‘벌레’들의 시대다. 기억이 옳다면 그 시작엔 ‘일베충’이 있었다. ‘일베충’은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와 ‘충(蟲)’의 합성어로, 일베 이용자들이 금수만도 못한 ‘버러지’라는 단호한 경멸을 담고 있는 용어다. 벌레, 혹은 금수와 구별되는 ‘인간’이라는 (상상적) 위상은 이때까지만 해도 확고했던 듯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지잡충, 지균충, 설명충, 진지충, 따봉충, 맘충 등을 비롯한 ‘○○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학교 영어수업시간에 우리는 직업 뒤에 ‘er’을 붙이면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가 된다고 배웠는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단어 뒤에 ‘충’을 붙이면 곧바로 앞단어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가 된다. 목하 대한민국에서 인간은 ‘벌레’라는 꼬리표를 뒤에 달고 서야 비로소 사회적 실체를 가진 집단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샛별은 한강의 소설을 다시 읽는 자리에서 “우리는 분명 추락하고 있다. 인간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벌레로, 그리고 또 무언가로”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분명’ 정확한 진단이다. 「식물적 주체성과 공동체적 상상력」, 『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 357면)

 

이러한 ‘벌레-되기(만들기)’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일례로 ‘급진적 페미니즘’을 표방하고 있는 ‘메갈리아’에서는 한남충, 애비충, 똥꼬충 등의 단어를 심심찮게 사용한다. 이 용어를 쓰는 사람들은 이것을 ‘미러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미러링의 전략적 유효성을 십분 이해하는 일과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벌레들의 무한증식’을 씁쓸하게 바라보는 마음이 상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 ‘존엄의 하향평준화’는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은 걸까? 타인과 스스로에 대한 ‘존엄의 추구’는 이제 더이상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보적 가치의 목록에서 폐기처분된 것은 아닌가? 내가 도나 힉스(Donna Hicks)의 『관계를 치유하는 힘, 존엄』(박현주 옮김)을 뒤늦게 손에 잡은 건 바로 그러한 의문들 때문이었다.

 

‘존엄’이란 무엇인가

 

먼저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인 저자는 “오늘날 우리의 행복에 가장 위협적이라고 인식되는 것은 물리적이거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심리적인 것”이며 그것은 곧 “존엄에 대한 위협”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존엄에 대한 위협은 “자존심을 훼손할 뿐 아니라 우리와 타인의 최선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 또한 훼손”하며 우리의 “사회적 행복”을 극단적으로 침식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분쟁지역이나 제3세계의 삶, 혹은 여성살해가 빈번히 일어나는 현실을 가리키며 “물리적이거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외부에서 부과된 폭력의 선차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캄보디아 등 세계적인 분쟁지역에서 갈등해결 전문가로 활동한 바 있는 저자가 그러한 물리적 폭력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저자는 그러한 물리적 폭력이 육체적 위협에 그치지 않고 한 개인의 존엄성을 훼손함으로써 극단적인 트라우마를 남기는 일의 위험성을 강조하려 한다. 그렇다고 할 때 존엄성의 훼손에 따른 위협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북반구의 국가들에서도 커다란 실존적 위험으로 떠오르게 된다.

 

존엄성의 훼손이 야기하는 상처의 심각함을 설명한 뒤 도나 힉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한 ‘존엄 모델’을 제시한다. 그녀는 ‘존엄의 10대 요소’로 정체성 수용, 소속감, 안전, 공감, 인정, 공정함, 호의적 해석, 이해, 자주성, 책임성을 꼽고, 자신과 타인의 존엄을 동시에 위협하는 요소로 미끼 물기, 체면 세우기, 책임 회피하기, 그릇된 존엄 추구하기, 그릇된 안전 추구하기, 갈등 회피하기, 피해자 자처하기, 타인의 비판적 견해에 저항하기, 죄책감을 벗기 위해 타인을 비난하고 모욕하기, 그릇된 친밀감에 빠져 험담 나누기 등의 열가지를 제시한다.

 

사실 처음 책을 읽을 땐 심드렁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모델을 구성하는 언어들이 일견 식상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말은 좋지. 그런데 이런 도덕군자 같은 말로 현실의 복잡하고 꼬인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반발심도 솔직히 들었다. 이런 교과서적인 말보다 차라리 현존하는 적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이론서들을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런 책들은 화해할 수 없는 적대를 정치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하고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으로 봉합하려는 관념적 술책에 지나지 않아’라는 익숙한 진단도 또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계속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얼마간 당혹스런 기분이 되었는데 왜냐면 내가 식상하다고 여긴 저 지당한 말들에 대해 실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존엄’을 이해한다는 것이 저자의 말처럼 타인의 존엄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나의 존엄을 지켜나가는 방법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때, 나는 ‘존엄’이라는 낱말의 뜻은 알고 있을지언정 그걸 진지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려 굉장히 잘못 알고 있었다. 나의 소중한 인격을 침해하는 외부의 그릇된 취급에 올바르게 분노하는 것만이 나의 ‘존엄’을 유지하는 방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나는 ‘존엄’의 주어로 ‘나’를 상정했지 내 곁의 타인을 떠올리지 않았다. 존엄이 침해돼선 안될 것은 오직 ‘나’ 자신이었지 ‘너’는 아니었단 말이다. ‘너’는 나의 존엄을 침해할 잠재적인 위험이거나 아니면 나의 존엄을 위해 기능해야 할 자원에 불과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침해당해 왔는지를 깨닫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지만,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그들 자신도 침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내면, 그것은 감내하기 힘든 진실이 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나의 존엄과 타인의 존엄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때로 나의 존엄을 그릇되게 추구하는 것이 타인은 물론이고 나의 존엄까지 침식하는 행위일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은 ‘존엄’에 대해 근본적으로 취약한 인간의 한계를 정면으로 직시한다. 가령 저자의 말처럼 “존엄을 침해하는 형태로 서로에게 심리적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만큼이나 타고난 것”이며 “부당하게 대우받으면 우리는 화가 나고, 모욕을 느끼며, 보복하고 싶어지는데, 그런 경우 대체로 이러한 원초적 반응이 우리 행동을 어느 정도로까지 몰고 가는지 자각하지도 못한다.” 저자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동물로서 인간의 진화과정과 연결해 도출해낸다. “우리는 존엄 또는 자존감에 대한 위협을 마치 신체적 위협에 처한 것처럼 느끼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으며 “우리의 자기방어본능은 안전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자기 보존을 위해 맞서 싸우거나 아니면 물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동물적인 본능은 “마치 우리가 정복당할 것처럼 느껴지는 위협적인 상황에 쉽게 반응”하게 하며 “감정의 포로”가 되어 “종종 불필요한 과잉된 반응”을 야기한다.

 

자신에 대한 성찰을 시도해볼 때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동물적인 본능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본능이란 이유로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앞선 마루야마 켄지의 말처럼, 도나 힉스 역시 우리가 그러한 동물의 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을 추구하고 정립해야 함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능적 반응들이 존엄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고,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는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한다. (…) 그러한 고귀한 선택은 저절로 오지 않으며 내면 투쟁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계속 발전하기 위한 도전의 핵심이다.” 그렇다고 할 때 ‘벌레들의 무한증식’은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동물적 본능에 너무 쉽게 굴복한 결과라는 점에서, 인간의 동물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은 사회적 모순의 집단적 해결을 도모한다기보다 개인의 태도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익숙한 자기계발의 서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자아의 테크놀로지’는 존엄에 관한 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침해가 유희처럼 횡행하는 이 땅에서 한번쯤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비록 그녀의 제안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과 분노, 미움과 적대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세계를 재조직화하는 데 유용한 실천윤리로 기능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나 역시 적잖이 비관주의자가 된 걸까. 아마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난 뒤 도나 힉스보고 꼭 ‘존엄충’이라고 부를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이 바로 그러한 섣부른 재단에서 비롯된 냉소와 자조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16.8.1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