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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광기’에 맞서는 대안: 최강 제재냐 동결식 평화냐

이정철

이정철

9월 9일 북한의 5차 핵실험 사실이 알려진 직후, 박근혜 대통령은 “김정은의 정신 상태는 통제 불능”이라며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단문 메시지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우리 대통령의 대국민 담론 발신 능력은 뛰어난데, 이번 메시지에 대한 국내외의 반응은 어째 그리 신통치 않은 듯하다.

 

광인 vs. 노련한 독재자

 

『뉴욕타임즈』는 9월 10일, “미치긴커녕, 너무 합리적”(far from crazy, too rational)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북한을 비합리적 행위자로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자국의 이익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지켜야 자국에 유리한가를 잘 아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김정은은 그 요건을 충분히 충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포감을 조성하여 상대방의 위협 인식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광인(madman)이론을 역으로 위협 도구로 사용하는 합리적 광기(rational irrationality)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19일자 『월스트리트저널』은 김정은이 할아버지의 소탈한 이미지를 통해 권력 안정화를 꾀하는 노련한 독재자라는 내용의 사설을 내보냈다. 김정은을 광인으로 보고 북한체제의 불안정성을 전제로 정책을 수립하는 한미 당국의 정책실패를 지적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미국의 대북정책 담당자들이 대북제재의 효과성을 강조할 때 사용해온 논리는 간단하다. 2013년 이후 북한이 핵실험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북제재가 북한의 핵실험을 막는 유효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전략적 인내의 한 축을 이루는 제재와 다자적 협력론은 그러나 북한이 4차, 5차 핵실험을 연달아 진행하고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나 이동식 고체연료 탄도미사일 실험에 잇달아 성공하자 무기력한 논리가 되고 말았다.

 

올초 4차 핵실험 이후 실행된 소위 ‘최강 제재론’이 단기효과 즉, 핵실험 억지에는 실패했지만 장기에 걸쳐 효험을 볼 것이라는 논리는 여전히 설득력 있는 예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 죽을 것’이라는 명구의 패러디 앞에 장기 효과론의 한계는 분명해진다. ‘핵을 가진 적’이라며 급박한 위기론을 꺼내들고 사드(THAAD) 장사에 여념 없던 인사들이 느닷없이 장기 효과론 운운하는 것은 자가당착적 논리다. 정책실패에 대한 책임론을 벗어나기 위한 애잔한 변명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희망적 사고라는 데자뷔?

 

박근혜정부가 스스로 신뢰프로세스, 통일대박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거둬들인 만큼 공약 이행에 실패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같은 평가는 자명하지만, 정책 담당자들은 여전히 정책실패를 자인하지 않고 사정 변경론만을 내밀 따름이다.

 

그들이 말하는 사정 변경은 뭘까? 케리(J. Kerry) 장관을 압도하는, 라이스(S. Rice)와 파워(S. Power)라는 두 여걸이 버티고 있는 오바마 외교팀의 대북정책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북한에 대해서 초강경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때문에 한국정부의 대북협상론이 설 자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박근혜정부의 대북 강경론이 오바마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는 한국정부가 미국의 대북 직접협상을 저지하던 과정에서 한미 간 불협화음이 증폭되었던 YS정부 말기의 데자뷔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지금 케리 국무장관의 협상론에 주목한다는 우리 진보언론의 시각(「미국 쪽의 대북 협상론을 주목한다」, 한겨레 2016년 9월 20일자 사설)은 미국의 협상 의지를 확대하여 그 당시로 환원시켜놓은 ‘희망적 사고’에 다름 아니라는 게 사정 변경론자들의 논리다. 9월 6일 북한 최선희 미국국 부국장이 북경으로 나오던 날 일부 언론이 북미협상론을 점치고 있었지만, 바로 그날, 미국이 북한을 겨냥하여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니트맨Ⅲ’를 발사한 것을 보면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 제재 의지는 불가역적이라는 것이다.

 

동결식 협상과 재난관리 태세

 

우리에겐 앞서거니 뒤서거니 남-북-미 셋이 서로 강경론으로 일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정책결정자들 사이의 라이벌 관계에선 누가 앞이고 누가 뒤인가가 중요한 모양이다. 하긴 책임론으로 들어가면 역사적 평가가 따르니 억울함은 벗겨줘야겠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우리 정부의 억울함을 벗겨주기엔 정책결정 과정이 너무나 불투명하다. 이 정부의 논리를 들어주고 도와주려야 근거나 정보가 없다. 정책결정자들의 변명을 앵무새처럼 옮기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평가가 억울하면 직접 나서면 될 일이다. 거대권력의 뒤에서 보잘것없는 영향력이나 행사하는 비루한 참모가 되지 말고. 진정 위기를 말하려면 직을 걸고 행동하는 권력자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필자는 ‘동결’의 필요성을 말해왔다.(「평화체제의 입구론과 비핵화 팻말론」, 창비주간논평 2016.3.9.) 북한의 핵과 로켓 실험의 동결을 위해서 한미군사연습의 축소를 포함한 어떤 협상이라도 할 때가 되었다. 뚜렷한 대안 없이 장기효과론이나 반복하는 ‘최강 제재론’만으로는 당면한 위기를 막기에 불충분하다. 한반도 분쟁지역화라는 마지막 생존전략을 카드로 쥐고 있는 ‘합리적 광기’를 장기효과론에 빛나는 ‘최강 제재론’으로만 맞서자는 것은 빛바랜 주장이다. 세월호와 지진, 그리고 수해에 시달리는 남북 주민에 대한 방기와 볼모 정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평화관리는 재난관리 능력이다. 이 재난의 본질이 북핵과 종북 때문이라 주장하겠지만 평화관리에 실패한 정부는 재난관리의 루저로 취급될 따름이다. 지금의 위기를 위기로 보지 않고 장기효과만 되뇌고 있어서는 재난예방의 실패에서 오는 전대미문의 대재앙으로부터 면책사유를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이정철 /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16.9.2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