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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혐오의 양가성과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수치심을 읽는 법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2015

 

 

rehreh여성혐오 논란이 뜨겁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넥슨 성우 해고 건을 거쳐 정의당 내 메갈리아 논쟁에 이르기까지. 공론장에 거대한 화염을 몰고 온 이 ‘여혐’ 논쟁에서 흥미를 끌었던 것 중 하나는 혐오의 가해 주체로 명명된 이들이 일부 우익청년들을 넘어 ‘진보’와 ‘리버럴’의 가치를 포괄적으로 지지하는 온라인 남성 유저들이라는 점이다. 이 남성들의 반응 중 흥미로운 한가지는 다음과 같은 발언이었다. “나는 여성을 사랑할 뿐 결코 혐오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차(性差)가 아니라 성별 간 공존을 말하고, 본인들의 사랑이 혐오로 번역되는 데 대해 강하게 반발한다. 스스로를 ‘일간베스트저장소’ 유저 등의 우익청년들과 분리해온 이들은 지난여름 일부 ‘중도개혁’적 사이트들을 통해 반(反)메갈리아의 거대한 전선을 형성했다.

 

‘혐오(嫌惡)’는 누군가를 싫어하는 감정을 말한다. 반면, 학문적으로 hate와 disgust는 단순한 미움만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양가적 정서들을 동반한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의 이 책은 좁게는 역겨움, 혹은 불결함의 감정을 뜻하고, 맥락에 따라서는 혐오라는 적극적인 감정표현으로 이해 가능한 disgust의 개념을 천착한다. 우선 누스바움의 논의를 참고해, disgust 개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소로 정리해볼 수 있다.

 

1) 혐오(disgust)는 오염에 대한 불안에 다름 아니며, 주체의 안과 밖 간의 경계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촉발된다. 특히 전염의 효과를 갖는 에이즈 등의 일부 질병은 혐오(disgust, 역겨움)의 대상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 질병은 주체의 밖에서부터 (전염을 통해) 주체 내부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따라서 disgust의 감정은 에고(ego)가 형성되는 세살 이전에는 발견하기 힘들며, 동성애 등의 성소수자들처럼 이성애적으로 형성된 ‘문명’의 집단 에고를 내부적으로 흔드는 존재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혐오’는 근본적으로 자아 경계의 동요로부터 파생되는 감정이다.

 

3) 이러한 경계 동요 현상이 근본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문명’이 충분히 억제할 수 없었던 인간 안의 동물성 혹은 동물적 유한성의 지표들이다. 문명은 진보한다고 간주되며, 동물적 유한성과 그 유한성이 상기시키는 ‘유약함’(혹은 추악함)을 넘어 나아가고자 한다. 트림이나 콧물 혹은 기타 인간의 배설물들은 인간에게 ‘수치심’과 ‘역겨움’을 안겨주는 반면, 새로운 민족국가의 경계를 구성해가던 20세기 초 혁명과 전쟁의 흐름들은 주먹을 쥔 강인한 남성 이미지를 통해 ‘국경의 확정’과 함께 문명 재건의 거대한 파토스를 확산시켰다. 

 

4) 남성의 주먹과 근육질로 대표되던 20세기 문명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disgust의 대상은 대체로 ‘점액성’을 갖고 유동적이며 경계가 모호하다고 간주된다. 여성은 남성지배의 틀을 내부로부터 흔드는 존재(‘꽃뱀’ 등)가 되고, 유대인은 독일 민족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존재로 이해된다.

 

5) 부당함이나 위해 등의 외적 현상에 대한 반응인 분노와 달리 자아의 경계를 균열시키면서 나타나는 disgust에서는 대상이 실재보다 이미지에 의해 압도되고 신비화되는 경향이 강하다. 대상의 신비화는 폭력의 이상화(理想化)를 이끌며, 혐오 대상을 제압하기 위한 문명인(근육질의 남성)의 극단적 폭력을 호출한다.

 

혐오(disgust, 역겨움)란, 이처럼 집단적 에고의 동요로부터 파생되며, 혐오폭력이란 그 경계 동요로부터 문명의 ‘순수성’을 재구축하기 위한 일종의 ‘근원적 폭력’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미국의 주류 법학 담론에서 disgust는 법리 해석에서도 의미심장한 해석의 준거점을 제공해왔다. 예컨대 동성애 혐오로 인한 살해는 살해 자체가 갖는 위법성에도 이성애 문명 기반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문명수호라는 가치판단하에) 일정한 합리성을 가지며, 따라서 형량의 감축을 위한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리적 판단의 준거가 되는 것은 그 보통 사람들의 기준이 흔들릴 때 문명 그 자체의 경계가 와해되리라는 불안인데, 이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불안과 연루된 혐오 대상의 위치다.

 

혐오 대상은 근본적으로 혐오 주체의 내부와 외부 어딘가에 모호하게 걸쳐진 채로 존재한다. 예컨대 누스바움은 인간의 배설물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혐오스러운 것은 이질적인(alien)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신체적 생산물은 신체 내부에 있는 한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지만 신체 밖으로 나가는 순간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168면, 번역 수정) 주체의 내부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그것이 과잉되어 (에고를 교란하며) 주체 밖으로 나가는 순간 혐오의 대상이 된다. 혐오는 단순히 타인을 ‘과격하게’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초과해 나간 것으로부터 주체의 경계를 재확정하고자 하는 질서확립형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일한 것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적용된다. 남성지배의 일부일처제에서 ‘여자를 가진 남자’는 문명이 형상화하는 규범적 남성성 모델에 정확히 부합하는 존재다. 그는 열정적으로 여자를 사랑하며 자신의 사랑의 순수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 관계를 교란하는 모든 불순물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문명의 순수성을 재확립하고 싶었던 역사 속의 수많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남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에고를 점액성 물질처럼 넘나드는 여자들의 어떤 ‘과잉성’이다. 지난 5월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여름의 ‘메갈리아’ 논쟁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여성의 이름으로 진행된 어떤 과잉성들에 직면하며 당황한다. 누스바움의 논의에 따를 때, 이 당황은 공포나 분노보다는 수치심에 가까운 감정이다. 죄책감이 행위에 대한 반성이라면, 수치심은 에고의 총체성이 손상된 데 대한 반응이다. 에고를 완결적인 것으로 통합시켜 주어야 할 대상이 자신에게서 이탈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청년 남성들은 격렬한 반메갈리아 전선을 통해 이 수치심의 무기력한 정념을 회수하고자 한다.

 

애초에 혐오는 주체의 내부에서 주체를 초과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내부로 들어오지 않은 것을 혐오할 수 없듯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여자를 혐오할 방법은 없다. 인간의 동물적 유한성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혐오와 수치심의 문제를 연역해내는 누스바움의 논의는 이러한 맥락을 설명하는 데 있어 탁월한 영감을 제공한다. 다만, ‘혐오’와 ‘수치심’의 원천을 이해하기 위해 대상관계이론이나 여타의 임상심리학 연구에 준거하는 방식이 혐오의 역사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누스바움이 사용하는 ‘문명’의 개념이야말로 모더니티의 산물이며, 1차대전기의 시대정신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에른스트 윙어(Ernst Junger)의 ‘새로운 남자’(Der neue Mensch, 새로운 인간) 개념이 전쟁과 혁명을 동반한 서구 문명의 질서재구축 과정에 동원된 수사였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혐오의 역사성이라는 화두는 이 책의 논의를 연장시키는 별도의 탐구주제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주체의 내부와 연결되어 있되 내부를 초과해 뛰쳐나가버린 무엇. ‘(메갈리아로 표방되는) 여성들의 반란’이 어떤 경계에서 시대의 화두를 분주히 미러링하는 중이다.

 

정현 / 정치철학 연구자

2016.9.28 ⓒ 창비주간논평